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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을 변화시키는 설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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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494 | 추천 | 0 | 비추천 | 0 | 2018-10-09 06:32 | 작성자 : 김목사 |
청중을 변화시키는 설교   해돈 로빈슨/고든 콘웰 신학교 설교학 교수
설교할 때가 되자 저는 숙제를 끝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본문이었으나 철저하게 연구했기에 주어진 본문의 확실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시작한지 5분이 지나자 저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10분이 지나자 사람들은 잠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줄에 앉아있던 한 성도는 코를 골기까지 했습니다. 더 비참했던 것은 그의 코고는 소리에 아무도 방해받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듣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문제는 제가 설교 시간 내내 저를 사로잡았던 신학적인 난제들과 씨름하는 데 보냈다는 것입니다. 제가 했던 모든 말은 정당했습니다. 신학교 수업이었다면 매우 강한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서, 그 강단에서는 끔찍한 설교였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건 제가 성도들의 삶의 문제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답했던 것은 저의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이었을 뿐 성도들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 날 저의 설교를 들었던 성도들 가운데는 이제 본향으로 돌아가 주님과 함께 거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싶었던 것은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무덤의 구덩이에 던질 것인가 아니면 나를 안전하게 본향으로 인도할 것인가? 천국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그들이 듣고 싶어했던 설교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우주의 창조주는 우리를 위하여 집을 준비하는 데 2,000년이나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는 데 6일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는 집이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이생의 삶이 끝날 때 이 아름다운 집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면서 준비해 놓으신 곳입니다.”
정반대의 실수도 가능합니다. 설교 내내 적용하느라 시간을 보내지만 성경에 근거하지 않을 때입니다. 저는 성경을 약화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연결시킬 수 있는 다리가 아무 것도 없는 고층건물식의 설교도 가능합니다. 그런 설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는 있지만 영원한 말씀의 능력을 줄 수는 없습니다. ‘언덕 위의 집’은 서구의 가요에서 나온 것이지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비성경적인 사변으로 가득찬 설교는 결국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제가 서재에서 연구한 것도 사람들의 질문에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성경 본문과 삶을 연결시키는가 하는 적용의 문제입니다.   본문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 여기서 주석과 해석의 차이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석은 때때로 동사의 시제나 원문에서 강조된 단어를 눈여겨봄으로써 본문으로부터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우리가 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는 주일 아침의 설교로서는 결코 적당하지 않습니다. 사실 희랍어나 히브리어를 지나치게 사용하면 현학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직업상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난 당신이 모르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요”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와 청중간의 거리감을 생기게 하는 데는 다름 아닌 거만함이 배어 있습니다.
집으로 가면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 여인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만들다니. 평범한 사람들이 학구적인 말을 배울 수 없기에 학문하는 사람들이 대중의 언어를 배워야한다는 스펄전의 말이 옳았습니다. 알아듣게 하는 것이 목사의 임무입니다. 단지 주석만 한 것으로는 주일 아침 설교가 될 수 없습니다. 해석이 있어야 합니다. 해석이란 주석에서 얻은 것으로 본문 이해에 필요한 것을 성도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자가 주해한 것을 모두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의 구성이나 흐름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설교한 후 몇 주지나 그 본문을 대할 때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교회에 주석이 필요 없다는 뜻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연구하실 때 여러분은 자세한 성경공부를 즐기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모든 종류의 자료들을 다 파헤쳐도 좋습니다. 그러나 설교에 이토록 미세한 것을 포함시키는 것은 정신을 혼란시키는 각주를 읽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기술적인 가르침은 교실에서나 적당합니다.
도널드 그래이 반하우스(donald gray barnhouse)는 이것을 흥미로운 방법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설명을 합니다. 동사의 시제를 밝혀주고 어떤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하게 말하고자 할 때 잠시 멈춥니다. 본문을 읽는 데만 10분이 걸립니다. 그는 주석에 근거하여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때도 반하우스는 자랑하는 어조가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에게 고대 언어 강의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이 성경 저자의 생각의 흐름이나 느낌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의 연구에 기초하여 본문을 강조할 수 있도록 시간을 안배한 것입니다. 제 10장로교회에 처음으로 참석한 사람들은 성경 읽는 것을 듣고 설교를 들은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설교에 들어갈 때 반하우스는 설교를 설교되게 하는 것, 즉 본문의 메시지, 의미, 적용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말합니다. 스패어 타이어는 어떻게 찾는지, 공구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푸는 열쇠는 어디에 있는지. 다 알려주고 난 다음 제가 “자, 이제 부탁이야. 타이어 갈아주겠니?”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제 차가 잘 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단지 명쾌한 설명만 필요로 할 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보며 우리 자신과 서로를 볼 것인가와 같은 신학의 기본적인 이슈들을 다룰 때는 구체적인 적용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을 설교하면서 본문은 과학적인 이슈를 다루기 보다 신학적인 질문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여러분은 세 그룹으로 날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날은 빛이요 넷째날은 빛들에 관한 것이며, 둘째날이 바다와 하늘이라면 다섯째 날은 물고기와 새들에 관한 것입니다. 매일 창조는 하나님의 평가로 이어집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리고 나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며 창조에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생물은 “그 종류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 함께 일하는 사람들, 혹은 거리에서 잠자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 말씀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이런 설교는 직접적인 적용은 거의 없이 해설만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적용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설교가 끝나면서 누군가 깨닫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든 남녀는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만 하면 사람이 자신과 타인을 보는 시각에 실제적으로 놀라운 차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을 보세요.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을까?” 여러분은 이신칭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울의 약간 난해한 토론으로 성도들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잘 준비하여 마치고 나면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면서도 하나님도 여전히 의로우실 수 있구나.” 명백한 것은 이 본문이 놀라운 적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복잡하여 여러분은 아마도 바울의 논증을 제대로 다룰 수도 없고 구체적인 많은 적용을 동일한 설교에서 세밀하게 다루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성도들이 진실로 잃어버림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기만 하면 구원 문제를 설명하는 것으로도 강한 적용이 될 것입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이 스스로 구체적인 적용을 할 수 있도록 믿어주어야 합니다. 저의 경험 가운데 저를 가장 성숙하게 만든 것은 끊임없이 제 속에 이러한 생각이 사로잡을 때였습니다. 이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그러나 제 생각에 더욱 위험한 것은 이와 반대되는 점, 즉 설명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적용을 충분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면 강단을 떠나면서 자주 느낍니다.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보였어야 했는데.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하기까지 성도들이 믿는 바에 따라 살기란 어렵습니다.
제 친구 중에는 신앙생활을 일기로 기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일은 그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앙일기에 대하여 설교할 때, 그것을 쓰지 않는 사람은 성장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 특정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 원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율법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 진리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할 때마다 율법주의를 조장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면 어떻게 구체적인 적용을 설교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의 보기를 가지고 답하겠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저의 장모께서 암으로 위독하게 되자 덴버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결혼 생활에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저는 덴버 신학교 총장으로 자리를 잡으려 애쓸 때였습니다. 제 아내 보니는 밤낮으로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축축한 침대를 하루에도 여섯 번 내지 일곱 번 갈아야 했습니다. 18개월 동안 보니는 장모님을 우리 집에서 간호했습니다. 저의 장모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후회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해드리기 위해 보니가 최선을 다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연세 드신 부모님을 어떻게 모실 것인가? 집에서 모실 것인가 아니면 간호소에 모셔야 하는가? 기독교적으로 획일적인 대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상황, 자녀들, 재정, 그리고 부모님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의 큰 원칙은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며 그분들에게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기독교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이기적인 전제로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는가는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 달라집니다. 율법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경의 원칙과 구체적인 적용간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입니다. 설교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어떤 원칙을 단지 한 예가 아니라 두 개나 세 개의 예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칙을 그것을 적용하는 특정한 한가지의 방법과 동일시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이들과 매일 경건의 시간, 즉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뭔가 하나님께 실패하는 삶이다란 생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정 예배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좋았지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정을 위해서는 잘 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아이들의 속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가정 제단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중심이라 생각했기에 그대로 밀어부쳤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가정 예배가 원칙이 아니라 원칙의 적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원칙은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원칙에 해당되는 동일한 요구를 우리 가정 예배에 잘못 주입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차원으로 접근하게 되었고 한 가지가 우리에게 적합했습니다. 우리 두 아이는 각기 다른 시간에 학교에 갔습니다. 비키가 등교하기 전 아침마다 하루를 맡기며, 그 날 일어날 일을 위해 딸아이와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잠시 후 토리와 그의 한 친구가 저의 서재로 들어올 때 하루의 일들을 위하여 5분간 앉아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침마다 식탁에 앉아 가정 예배를 드린 것만큼이나 만족스럽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원칙을 존중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원칙과 그 적용간에 분명한 구분을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적인 원칙이 추상적이거나 막연하게 들리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때때로 설교자는 그 원칙을 회중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단순하게 번역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제사장이 희생을 드림으로써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정결을 베풀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대표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설교도 이와 같습니다. 훌륭한 설교를 듣고 있으면 주위에 누가 있는지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설교자가 말할 때 하나님께서 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때는 본문을 해석하는 시간이 지나가고 적용의 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원칙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이 본문을 적용했는지 두 세 가지의 예를 보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이 본문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이제 당신은 당신의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제 당신은 결혼서약을 신중하게 지킬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 때 당신은 복수가 아니라 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 시점에서 설교자가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청중과 분리되어 서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인 적용을 할 수 있도록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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