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의 예수

추천 : 0  |  비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  2015-10-27 20:19

언제부턴가-목사들의 볼 성 사나운모양들이 세상의 신문들과 TV 뉴스거리로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봇물처럼 터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 교회 안에서 목사끼리의 칼부림이 나고 둘 다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보도입니다. 공금횡령 등 돈과 관련되어 고소를 당해 세상의 법정에서 연신 마른 침을 삼키고 있고, 유명교회 목사가 여자문제로 쫓겨나는 꼴을 보이더니, 여아 성추행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구속되지를 않나... 엊그제는 강남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가 부목사를 해하려고 흉기를 들고 찾아갔다가 소란 끝에 부목사의 귀를 물어뜯고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왜들 이러는 것일까...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렇듯 드러난 것들을 바라보며 비웃고 손가락질합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도 수군수군합니다. 드디어 주님이 말씀하신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때가 된 것일까요... 그들은 처음부터 목사가 되지 말았어야 했던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목사가 될 때에는 뜨거운 마음이었지만 나중에 그렇듯 시험에 발목을 잡힌 것일까요... 어떤 목사님들은 주의하고 조심해야지. - 나만 아니고 우리 교회만 아니면 돼-.”라고도 합니다. 나를 지키고 우리교회를 먼저 지킨다는 것으로서는 틀리지 않는 말이기는 하지만 나만 아니고 우리 교회만 아니면 돼-”는 또한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든 교회에서든 악한 것은 너무나도 쉽게 하나의 풍조가 되어 자꾸만 잠식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진저리를 치지만 자꾸만 계속되어질 때에는 다 그런데 뭐...’하며 무감각하여지는 것이지요. 내 안의 영()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은 바늘은 물론 송곳으로 찔러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영이 죽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아무리 악한 모양이 자신과 교회를 엄습하여도 거기에 저항하고 대항하여 싸울 줄을 모르고 자꾸만 자기변명의 많은 말들만 늘어놓으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데 만 급급하다가 결국에는 온갖 추한 모양은 다 뒤집어쓰고 다시는 돌이켜 나올 수 없는 나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지금은- ‘어딘가에 있는 교회, 일면식도 없는 어떤 목사의-’ 사태이며 일이지만, 그것이 강력한 단죄함과 정죄됨으로 당장 뿌리가 뽑히지 않고 어정쩡한 모습으로라도 살아있을 때에는 아주 강력한 전염력과 생명력을 가지고 퍼지고 번식하는 것이기에 내일은 우리교회와 나의 일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나는 안 그런다.’라는 각오와 결심은 좋은 것이지만, 물이 자꾸만 차오를 때에는 피할 곳이 없어지고 젖지 않을 수 없고 함께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아니지만 뒤에서 와서 들이 받는-’자동차와도 같은 것이지요. ‘나와 우리 교회는 많은 목회자들 속에, 많은 교회들 속에 속하여져 있는 것이지 특별한 은혜로 공중에 떠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신갑주를 말씀합니다. 막아내고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공중이든 땅속이든 도망쳐서 달아나고 숨죽이며 피해있는 모습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궁극적이며 종국적으로 목사와 교회들이 피하고 의지하여야 할 곳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며 은혜이며 권능 속입니다. 그 곳은 물리적으로 뛰어 달아날 수 있는 어디어디가 아니라 살아있는 영이 판단하는 믿음의 자리이며 순교의 마당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처럼 일사각오의 믿음과 신앙으로, 안이숙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일념으로, 지금 나에게 가해지는 모든 미혹과 핍박과 환난을 물리치는 사람들이 성도이며 특히 목사들에게 주어진- 죽기까지 이루어야 할 사명이며 임무입니다.

 

그래서 산 것이 중요하고 살아있는 때가 소중합니다. 생명이 있을 때에 그 생명을 잘 보존하며 때를 놓치지 말고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돌이켜 회개할때이고 용서 받을 기회입니다. 목사들이 이러한 것들을 다 놓치고 돌아보지 않는 이유는 욕심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을 채우기 위한 욕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서1장을 한 번만 읽어보아도 크게 깨닫고 자신이 움켜쥐었던 모든 헛된 것들을 내려놓고 바른 길 진리의 길로 돌아서지만, 어떤 사람은 전도서 12장 까지를 백 번 읽어도 헛된 것들중에 단 한 가지도 내려놓지 못하고 여전히 바람을 잡는 일을 계속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을 손에 쥐고는 있지만, 그 삶은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손을 높이 쳐들기는 하지만, ‘방울달린 옷을 입고 시장 거리에서 두 손을 들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화를 위하여 경건의 모양을 애써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부 목사들이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예수님을 아무도 감히 근접 못할 황금 보좌에 억지로 모셔 놓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보좌를 후광으로 업고 마치 예수님이라도 된 양 무소불위의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서 가시관을 벗겨 놓고 황금관을 씌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김지하님은 금관의 예수를 희곡으로 썼고 여기에 영감을 얻은 김민기님은 금관의 예수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고난의 그리스도는 없어지고 영광의 그리스도만 있게 된 엉터리 신앙시대를 지적하고 풍자하며 노래했습니다. 빈자(貧者)의 모습으로 낮은 자리를 향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리석은 부자들의 창고 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며 오직 부자(富者)의 모습으로 높은 자리만을 향하여 몸부림과 발버둥을 동시에 치면서라도 치달아 오르려 하는 이들이 교회들을 장악하는 모양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가증한 것들이 거룩한 곳에 서있는-’ 모습입니다.

 

목사와 교회는 마땅히 온유하고 사랑이 가득하여야 할 것이지만, 자기 자신과 교회를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분명한 결단과 구분의 칼을 스스로 품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성령의 검입니다. 나를 미혹하고 교회를 흔들려고 다가오는 악한 것들을 향하여 망설임 없이 휘두르는 것으로 가차 없이 두 동강이를 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목사 된 나를 지키는 일이며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는 일입니다. 결단(決斷)이란 자를 것을 자르는 일에 망설임이 없는 모습을 말합니다. 오늘 날을 살아가는 목사들이여- 결단합시다. 이미 받았지만 오랫동안 쓰지 않아 새빨갛게 녹이 난 성령의 검을 다시 뽑아 듭시다. 오직 믿음으로 그 날카로움을 회복합시다. 나를 망치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들에 대항하여 성령의 검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은 내 편 되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적의지(全的依支) 합시다.

 

산골어부 김홍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