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백주년, 거울에 비친 자화상을 보라

추천 : 0  |  비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  2019-02-25 11:36

3월 1일은 국가적으로는 물론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도 매우 뜻 깊은 날이다. 3월이 가까워 올수록 우리 민족이 일제에 항거해 목숨을 걸고 나라의 자유 평화 독립 만세를 외쳤던 1백 년 전 그날의 함성이 오늘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서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맨손으로 평화적 만세시위를 벌인 역사적 사건이다.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들고 일어선 종교인들 중에 단연 기독교와 천도교가 중심 역할을 했다. 특히 기독교는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단계의 7개 계열 가운데 6개 계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정도로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고, 3.1독립 선언에 앞서 2.8독립 선언을 주도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고난 중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불굴의 신앙적 결단이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질수록 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도 기독교인들의 조직적 참여가 그 바탕이 되었다. 당시 총인구의 1.5%에 불과했던 기독교인이 3.1만세운동에 연루돼 일제에 의해 검거된 국민의 17.6%나 차지한 것만 봐도 당시 기독교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 모두가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비록 기독교의 체계적인 조직이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3.1운동이 그처럼 신속히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오랫동안 지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긴 하나 당시 기독교 인사들 중에는 교회에 피해가 돌아 올까봐 뒷짐 지고 나서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기류는 당시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들 중에 교회가 정치적인 시위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며 내세운 ‘정교분리의 원칙’에 동조한 측면이 있다. 이런 논리의 오류가 그 후 일제가 교회를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요한 신사참배에까지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동조하는 참담한 죄악으로 이어졌고, 결국 한국교회는 신학적 도덕적 타락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며 점차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간 것이다.


그로부터 1백 년 후, 지금의 한국교회는 3.1운동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수적 팽창은 물론 막강한 교권과 금권을 휘두를 만큼 힘이 세지고 비대해 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인 수가 증가하고 교회가 커지는데도 국가와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영향력은 갈수록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진단이다.


3.1운동 1백주년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으켰던 위대한 신앙적 결단과 정신을 과연 한국교회가 계승해 후대에 신앙유산으로 물려줄 자격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려면 최소한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서로를 정죄해온 분파주의와 몇 몇 대 교단에 의해 지금도 자행되고 있는 패권주의부터 청산해야 마땅하다.


한국교회는 걸핏하면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중에 기독교 지도자가 16명이었다는 것을 마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들먹인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기독교의 긍지요 자랑이 되려면 1백년 후 지금 한국교회가 나라와 민족 앞에, 또한 국민들의 마음속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한국교회에 있어 3.1운동 백주년은 시인 윤동주가 그의 시 ‘참회록’에 썼듯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으며”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기독교한국신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