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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연결의 설교자> 폴 틸리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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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4527 | 추천 | 0 | 비추천 | 0 | 2015-09-15 08:40 | 작성자 : 관리자 |
폴 틸리히는 “연결의 방법”(method of corelation)으로 알려진 신학자이다. 철학과 신학이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철학으로 질문하고 신학으로 대답하는 방법이다. 삶 속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성경으로 찾자는 것이다. 틸리히의 아버지는 보수적인 독일 루터교 목사였다. 아들에게 전통적인 가치를 존중하도록 가르쳤다. 반면에 어머니에게서는 열린 마음과 지식 탐구의 열정을 배웠다. 결과적으로 그의 평생 이 두 성품의 중간에서 “경계선”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고백했다. 어린 시절에는 농촌에서 살았다. 여기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다. 14살에는 가족이 베를린으로 옮겨간다. 또한 여기서 그는 도시의 활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는 자연의 질서와 신비를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진 신학자가 된다. 일차대전에는 군목으로 일했다. 전쟁을 통해 인간이 가진 파괴적인 심성을 본다. 동시에 신자는 주위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전쟁의 잔인함은 그로 하여금 예술에서 위안을 얻게 만들어준다. 이런 경험도 “연결의 방법”을 강화시켰다. 1933년 히틀러를 반대해 독일을 떠난다. 미국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신학과 철학을 강의한다. 콜롬비아, 하바드, 시카고 대학, 그리고 유니온 신학교에서 교수한다. 그의 연구는 플라톤 철학부터 시작해서 중세 신비주의 독일 관념주의 특히 실존주의에 집중되었다.   그의 설교 방법 실존주의적 인간관과 “연결의 방법”에서 틸리히의 설교작성은 이루어진다. 실존은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이었다. 인간도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잘 살고 싶어 한다. 좋은 먹을 것과 거처와 편안함을 원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 너머로 영적이고 영원한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유한과 무한의 중간에서 인간은 늘 불안하다. 그러나 인간은 비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이 불안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을 못 봐도 운명의 변화와 죽음의 공포를 견딜 수 있게 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종교의 피안으로 도피하면 안 된다. 이것은 참된 존재일 수 없다. 오히려 담담하게 자신의 실존을 받아들이고 용감하게 일어서야 한다. 이러한 실존주의적 인간관은 그의 설교 전반에 흐르고 있다. 그러면 연결의 방법은 어떻게 설교에 적용될까?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고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신학은 실존적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는 인간의 상황을 분석하며 동시에 기독교 메시지 안에 있는 상징들이 이러한 실존적 질문들의 대답임을 논증한다.” 다시 말하자면 신학은 두 가지의 기본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 메시지의 진리를 표현한다. 다른 하나는 그 진리를 현 상황에 가장 잘 적용되도록 표현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실존에 대한 대답을 해 주어야 한다. 실존 속에 인간은 불안하다. 유한과 무한의 중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의 문제 가운데서 고통하고 있다. 설교자는 복음 전달자로서 “사람들이 삶의 문제에 용감히 직면하여 참된 결단을 내리도록” 돕는다. 그가 보기에 “복음은 결단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를 읽어보면 먼저 상황을 실존적으로 분석해 준다. 그리고는 성경에서 찾아낸 존재 그 자체인 그리스도가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설명한다. 그래서 청중도 자신의 실존 속에서 같은 결단을 내리도록 격려한다. 전통적인 설교에서처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설명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믿으면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떤 복을 받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 스스로 결단을 내려서 문제 앞에 서서 싸워나갈 것을 권한다. 다음에 소개하는 틸리히의 설교 역시 그런 맥락에서 실존주의적이다. 여기서는 외로움과 고독함의 의미가 구분된다. 외로움은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홀로 있기 고통스러운 느낌이다. 홀로 있음은 인간의 실존이다. 고독 속에 인간은 인간이 되어가며 영원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외로움을 벗어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고독하라고 설파한다. 지면상 앞부분인 절반가량--주로 외로움에 관해 말한다--을 생략했고 편의상 소제목들을 첨가했다.   외로움과 고독(막1:12-13)   “그가 그곳에 홀로 계시니라.” 우리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인간인 까닭에 홀로입니다. . . 혼자라는 사실은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되는바 특별히 인간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인간은 홀로이며 자신이 홀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외로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합니다.   (중략)   감출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두 가지 형태의 고독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책감의 고독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고독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가 우리의 참된 존재를 거스려 행한 것들을 없애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범한 감추어진 죄와 드러난 죄를 우리의 것이요 우리만의 것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일어난 일들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남에게 전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범한 죄로부터 도망할 수 없습니다. 감출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가지고 홀로 서 있습니다. 이 고독은 다른 모든 형태의 고독 속에 파고 들어가 심판을 경험하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죽을 때 경험하는 고독이야말로 참된 고독입니다. 죽음 앞에 우리는 홀로 남겨져 있습니다. 어떠한 교제나 사귐도 이 고독을 없애지 못합니다. 죽는 순간에 누가 곁에 있어준다 해도 우리 자신의 죽음은 우리만의 것입니다. 죽는 순간에 우리는 우주 전체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됩니다. 죽는 순간에 이제까지 나 혼자였다는 사실을 잊게 해 주었던 모든 것들은 빼앗기고 맙니다. 도대체 누가 이 고독을 견디어낼 수 있겠습니까!   고독을 찾아 누리라 이러한 외로움과 고독은 그것들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우리는 외로움에 대한 자연적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혼자라는 사실을 고통이나 두려움으로서가 아니라 기쁨과 용기로 느끼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고독을 추구하고 누리는 데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종교란 고독을 견디어 나가는 것이다”고 말한 철학자의 말이 참이라면 그 모든 방법들은 곧 종교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들 중 하나는 자연의 침묵을 사모합니다. 우리는 소리 없이 나무와 구름과 바다 물결에 말을 건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말없이 나뭇잎 소리나 구름의 움직임이나 바다물결을 통해 대답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고독은 짧은 순간뿐입니다. 자연의 소리들이 마음에 대답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 앞에서의 고독은 쉽게 외로움으로 변하고 말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인간 세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시를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감상하며 사색에 잠길 때 고독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군중 가운데서도 우리는 여전히 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쓸쓸하지 않습니다. 고독은 우리를 고립시키지 않은 채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은 일상의 어쩔 수 없는 습관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생활은 우리를 다시 외로움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곤경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가 처한 상황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외롭습니다.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군중의 한 부분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그리고 현대의 모든 것들이 이러한 노력을 도와줍니다. 우리의 선생들, 부모들, 공공 통신기관의 관리자들이 우리에게서 고독의 조건들을 박탈하기위해 일합니다. 우리 집마저도 가족이나 식구들의 고독을 보호하는 대신에 프라이버시를 완전히 제거하도록 건축됩니다. 학교와 사무실과 공장도 그렇습니다. 즉, 우리는 고독에 대한 욕구마저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군중들로부터 불러내십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고독으로 인도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당신의 손이 내 위에 있는 까닭에 나는 홀로 앉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 위에 그의 손을 얹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고독 가운데서만 알 수 있는 질문을 제기하기 원하십니다. 비록 고통과 죽음을 당하더라도 고독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의에 대한 질문 던지기를 원하십니다. 욕을 먹고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고독 가운데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깨뜨리기 원하십니다. 오직 고독을 통해서만 들어나는 삶의 신비가 우리 존재의 한계까지 파고들기를 원하십니다.   고독은 창조한다 고독 없이는 창조적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창조적인 존재로 남아있을 수도 없습니다. 의식적 고독 가운데 있는 한 시간은 창조적 존재가 되는 방법을 배우는 다른 여러 시간들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창조성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러한 고독 가운데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께서는 그의 안과 밖의 사나운 짐승들과 대면하여 홀로 계셨습니다. 그 자신이 바로 거룩한 힘과 마귀적 힘의 싸움터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독 가운데서 일어나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내 자신이 아니라 창조와 파괴, 하나님과 마귀 사이의 싸움터로서 대면하게 됩니다. 고독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누가 이것을 견디어낼 수 있겠습니까? 예수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라는 기사를 읽습니다. 날이 저물자 그의 외로움은 한층 심화됩니다. 예수께서 기도하러가셨습니다. 외로움을 고독으로 변화시키고 그 고독을 견디어 내는 방법인가요? 이 물음을 쉽게 답하지 맙시다. 대부분의 기도는 그러한 힘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기도는 하나님을 대화의 상대로 만들어 참된 고독에서 도피하기 위해 합니다. 이러한 기도들이 평신도들이나 목회자들의 입에서 쉽게 나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고독한 만남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이런 기도는 예수께서 산에서 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이런 기도를 하기 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십시오. 그래서 고독을 열망하는 우리 영혼이 탄식하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쁘고 혼잡한 상황에서도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참된 고독의 순간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독의 순간에만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이들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 존재는 하나님의 거룩한 중심으로 높여지고 인도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을 상실하기 않은 채 평안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독은 영원성을 준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미 제기 했을 수 있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고독으로부터 교제와 사귐이 일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항상 혼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의 중심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고 다음 단계로 거기서 다른 존재로 되돌아가는 움직임 속에서 다른 사람의 내면의 중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의 외로움이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방법을 통해서 인간은 모든 존재의 중심이 평안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분과 교제를 나눕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교제를 나눕니다. 사랑마저도 이 고독안에서 재생됩니다. 왜냐하면 홀로 있는 사람들은 오직 이러한 고독 안에서만 그들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에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대화의 시간보다는 고독의 한 시간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그들을 영원한 언덕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도대체 고독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고독의 본질은 혼잡한 현세의 길 위에 실존하는 영원성입니다. 혼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 광채를 통해서 그리고 영원한 실존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고독은 빈곤한 것 같아도 모든 부요함이 있습니다. 담대하게 고독을 택합시다. 영원 속에 다른 사람들을 보고 우리 자신을 봅시다.   적용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사랑했고 즐겼다. 한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생각을 좀 하는 설교자라면 모두가 그의 설교를 읽고 상당히 많이 모방했다. 이런 설교를 하려면 그의 연결의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문화적인 질문을 던지고 성경적인 해답을 주면 된다. 하지만 그의 설교처럼 하려면 실존주의를 공부해야한다. 힘든 삶에서 어떤 종류의 실존을 선택하겠는가? 잘 먹고 잘 사는 데만 모든 힘을 다 모으겠는가? 아니면 괴로워하며 억지로 살겠는가? 삶은 어차피 힘들다. 최상의 실존은 용기를 가지고 삶에 도전하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자기의 갈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틸리히 식으로 하면 그리스도는 단지 훌륭한 모범일 뿐이다. 그를 보고 나 자신의 힘으로 최상의 실존을 만들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내 죄를 대신해 죽고 성령을 주어 신자의 삶을 살도록 도우시는 구세주의 개념은 보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자유주의 설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의 방법은 설교를 위해서 유익하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문제들을 제기하고 함께 그 문제의 답을 그리스도의 구원에서 찾는 것이다. 모범으로 그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믿고 의지할 때 우리의 문제를 짊어지고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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