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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릭의 오해
조회 287 추천 0 비추천 0 2019-07-05 20:25 작성자 : 이승만
구원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의 근원과 그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사도들에게 부터 a.d.1세기까지 이르기까지 성령님께서 나타난 그 사건 즉, 사도행전 2장부터 있던 사건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성령으로 즉시 나타난 예언과 환상과 꿈을 통하여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신 것으로써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한 것입니다.

a.d.70년 예루살렘성전의 파괴와 바울과 베드로 순교로 여러 곳으로 흩어졌는데 이때로 부터 안디옥에 있는 바나바로 부터 이그니티우스(a.d.35-107)와 서머나의 폴리갑(a.d.80-165) 등으로 이어진 예수 그리스도(행11:26)의 교회가 이때부터 이그니티우스로 부터 단일 감독제도와 그에 따른 세례, 성찬예식의 절차를 굉장히 중요시 되어 왔다.

이그니티우스는 "감독을 존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중을 받게 되고 감독의 승낙을 받지 아니하고 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악마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감독이 찬성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께서 기쁨이 된다. 감독에게 복종하되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한 것처럼 해야 한다.

또 누구나 모두 집사를 존경해야 한다. 감독이 성부의 대리자이듯이 장로들이 하나님의 회의요 사도의 무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집사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이그니티우스나 폴리갑은 기독교역사에 여전히 남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로마의 학정에 죽어 갔던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a.d.117년에 리용에도 박해가 심했다. 저스틴 마터도 이 때 죽었다.
a.d.313년 밀라노칙령에서 기독교가 로마국교로 변질되게 되었는데 이는 위의의 로마감독(후에 서방교회=천주교)와 안디옥,서머나 등의 감독(후에 정교회)과 서로 다투게 되었다. 이는 이그니티우스로 부터 서로 알력을 낳게 되었는데 이제는 더욱 심화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속셈은 한창 번창 중에 있는 그리스도교를 업고 로마제국을 굳혀놓기 위해서였다. a.d.325년 1차 종교회의(미케네)에서 318명의 주교들을 선발, 소집했던 배후에는 이빨을 드러낸 파워 폴리틱스(power politics)에서였고, 종교야 어찌되건 관심 밖의 일 이었다.

여기서 또, a.d.378년 로마감독(후에 천주교)은 이단교(몬타니즘,조로아스터교,바벨론 등)들의 최고 겸임 감독으로 임명 받았는데 결국 a.d.390년 교황(로마황제의 통제 아래)으로 칭함을 얻었고 그 이어 a.d.392년에 2차 종교회의에서 국교로 채택되었다.

이렇듯, 기독교가 로마교회(후에 천주교)의 틈 사이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서 가르쳐지던 진리가 거의 사라져갔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원래의 의미를 잘못된 교리와 유전(가톨릭)들에 따라 방황하게 되었다. 로마교회는 여러 차례와 회의와 결의문을 통해서 정설을 정립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것들은 교회를 점점 더 그리스도의 단순한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가르침이니 뭐니 전혀 아는 바 없었다. 그는 미트라의 태양숭배를 받들었었고 기독교세상이 된 뒤에도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미트라神의 초상을 조각,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써놓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 신앙의 의식이나,제도,관습,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로마교회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로마교회 사제의 명칭인 뽀파(father)는 미트라교 사제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며 미트라교의 주교는 자신들 직책의 상징으로 미트라 또는 미테르(주교관)을 썼는데 천주교의 주교들 또한 이러한 미테르를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의 성직자 계급 제도나 예배 형식 및 예배 시 쓰이는 도구들 즉 향불, 예배 의복 등등 모두 미트라와 흡사하다. 십자가 변형된 목걸이, 염주 알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연유로 라즈니쉬(불교의 명상요가)는 로마교(천주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황제라고 선언한 것도 눈여겨 볼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혼돈 속에서 한 사람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은 어거스틴이다. 그는 당대에 점차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으며, 로마교회(천주교)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 중의 상당 부분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어거스틴의해서 시작되었거나 더 발전 수립되었다. 눈 여겨 볼 것은, 그의 가르침과 신학적 영향력의 후광이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체에 드리워져 있어서 거의 모든 교회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 과정이 미친 영향


어거스틴은 a.d.354년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로마교(천주교)인이었고, 그의 부친은 마니교도였다. 마니교는 3세기경에 마니라는 사람에 의해서 창설되었는데, 이 종교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인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지류로서, 빛과 어두움(선과 악)의 대립을 강조하였다. 즉, 선과 악이 인간의 생애를 함께 다스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 스스로 합리화하고 핑계를 댈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단적 신앙의 배경을 가진 부모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하다가 20세가 될 무렵에 이태리 밀란에서 비로써 로마교회(천주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사람들은 기존의 이단종교에서 벗어나기란 굉장히 어려운데 그 것은 사탄으로부터 쉽게 놓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로마교인(천주교)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어렸을 때에 받았던 이교도적 개념을 머리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으며, 어린 시절에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던 사상이 후에 그의 신학적 사상에도 크게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함께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신학적 견해는 어거스틴 이후 700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오면서 수많은 천주교성직자들과 천주교신학자들을 교육시키는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다. 중세기의 교회 안에서 형성된 수많은 신학적 오류들은 거의 모두 어거스틴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그를 추종하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고 확산되었다. 어거스틴에 의해서 만들어진 잘못된 오류를 받아들인 많은 신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세워놓은 오류를 전제로 해서 또 따른 오류를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한 가지 오류가 또 다른 오류를 이끌어 들였다. 한 가지 오류를 진리로 입증하기 위해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예정론이 시작된 배경


이교의 사상에 물들은 어거스틴은 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사상, 즉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해서 선과 악 중에 어떤 하나를 택할 수 있다는 사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가졌던 이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절대적이고 독재적인 신으로만 이해했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사상이었다. 그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장면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개념에 끼워 맞추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예정론의 시작이 되었다.

그렇다면 에스겔 3장 18-21절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 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 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말씀 한 것을 선택이냐 예정론이냐 분명히 알게 하여 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론은 어거스틴의 생존하고 있을 당시에도 많은 도전(아퀴나스,바벌나드)을 받았는데, 어거스틴은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누가 구원을 얻던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며, 연약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에 대해서 질문할 자격조차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지정해 놓으셨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도록 지정해 두셨다는 예정론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예정론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오류


어거스틴이 세운 잘못된 견해는 예정론을 만들어 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예정론의 오류는 논리적으로 또 다른 오류를 만들어 내었다. 즉, 예정론은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게 된다는 개념(once saved, always saved)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예정론은 “절대적인 군주인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신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거짓 안전감에 도취되게 된다. 현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비도덕적인 죄악 된 생활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깊은 자기기만 속에 빠지게 만든다. 예정론은 복음을 전파하는 면에 있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결정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었다면,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정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대답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궁색한 설명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선언하고 있다(디모데전서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인 우리의 죄 된 선택과 이기적인 결정으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겔 3:18-21)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오류는 죄악 된 생활을 살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론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한 가지 오류에 대한 믿음이 또 다른 오류를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원과 죄에 대한 승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가 되며,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비록 그리스도인이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는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마니교 및 미트라교의 이단적 견해에 근거를 둔 어거스틴의 주장으로부터 로마교회(천주교)에서 나온 망상에 불과하다.


자신의 죄악 된 경험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수립된 신학

어거스틴은 성(sex)을 원죄라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그러한 주장은 자신의 죄악 된 생활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사생아를 낳음으로써 불법적인 아버지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사생활이 경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어거스틴의 생활 속에 있는 이러한 약점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 된 생활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신학적 핑계를 찾도록 유도하였다. 자신의 생애에서 죄에 대한 승리의 삶을 살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원죄의 폭을 점차적으로 넓혀서 다른 문제에까지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즉, 태어나기를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죄악 된 생활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의 신학적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어떤 목사나 신학자들도 자신이 경험하였던 것 이상의 설교와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어거스틴의 불건전한 생애를 통해서 누구든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미트라교와 마니교 사이에서 초대교회의 말씀이 죽었다는 “은사중지론(cessation theory)”을 제창한 어거스틴은 육과 영 사이에 무서운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역시 어거스틴은 영이 육,혼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은 기존의 이단종교에서 벗어나기란 굉장히 어려운데 그 것을 알고 예수 이름으로 좇을 때에도 사탄으로부터 쉽게 놓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을 때에 생기는 마음의 놀라운 변화 즉, 거듭남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음이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는 너무나 자연스런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하지 못했던 어거스틴,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소유하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악 된 경험에 맞추어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 자체를 죄로 생각하였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죄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죄란 우리가 태어나는 타락한 상태를 죄라고 정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죄란 우리가 태어나는 죗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마음과 행위로 범하는 불순종을 말하며, 성령께서 양심 속에서 들려주시는 조용한 음성을 거절하면서 선택하는 우리의 부도덕한 결정을 말한다. 어거스틴은 육체적인 본성만 인지 할뿐 하나님께 온전히 마음을 바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승리하고 정복하는 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의로운 선택과 의로운 결정을 통해서 말이다.


첫번째 딜레마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어거스틴은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셔서 승리의 생애를 사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과 동일한 육체를 취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생애를 사셨는데, 자신의 생애에는 승리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전혀 다른 몸을 가지고 태어나셨다는 억지 논리를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신 성육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요.”히브리서 4:15(킹제임스 성경 역).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는 자가 되는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심은. . .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그러므로 그가 모든 일에 마땅히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으니” 히브리서 2:14~18(킹제임스 영어 성경역).라는 것에서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의 육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혈과 육을 유전적으로 받고 태어나셨던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타락한 육체를 취하고 태어나셨다는 성육신에 대한 가르침을 뒤집어엎음으로써, 천주교회를 깊은 암흑 가운데로 이끌어간 무염시태설의 기초(a.d.800 성모 마리아의 기도)를 놓았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몸은 우리 인간들의 육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몸 역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로 바꾸어야만 하였다.

그러한 가르침에 기초하여 교회는 점차적으로 무염시태 즉, 성령께서 마리아의 육체를 완전하게 변화시킨 상태에서 아기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주장을 교리 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리아의 육체가 흠이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체도 인간적인 연약함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진리를 영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요한일서 4:2) 성경에서 육체라는 말은 항상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도덕적으로 연약한 본성을 가진 몸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음을 증명하려고 애썼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 있었지만, 그분과 전혀 다른 육체를 가진 우리 인간들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적 궤변을 통하여 자신의 죄악 된 생애를 신학적으로 변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를 분명하게 세우고 있으며(히 2:14~18), 그분의 모본을 따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경건하고 승리하는 생애를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님께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1)


두번째 딜레마


어거스틴이 예수님은 인간과는 다른 완전한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기상천외한 이론을 세워 놓았지만, 그는 또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어거스틴의 이론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는 인류로부터 멀어져 버렸다. 그리스도의 육체를 인간의 육체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놓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시험과 유혹을 당한 일이 없는 분이 되셨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시험받고 유혹받는 생애와는 전혀 다른 생애를 사셨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결론은 인간은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히브리서 4:15. 어거스틴이 만들어낸 이러한 이론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더 이상 인간의 모본이 될 수 없으셨으며, 그 결과 인류를 위한 중보자로서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셨다.

그리하여 로마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중보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예수 밖에도 구원이 있다 a.d.1963).

로마교회는 신학적으로 완전한 논리를 정립하기 위해서, 다른 인간들처럼 유혹을 느낄 뿐만 아니라,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짓기도 하는 중보자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로마교회는 성경이“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인류를 위한 새로운 중보자로 교인들에게 소개하기에 이르렀다(디모데전서 2:5). 나중에는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나가서, 수많은 성인(saints)들을 제정하게 되었으며, 사제들과 신부들에게 중보자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신자들로부터 죄의 고백을 받아서 하나님께 중보하게 만들었다. 교회는 어거스틴의 잘못된 사상과 신학에 기초를 둔 교리의 헛점을 메우기 위해서 한 번에 한 계단씩 오류에 오류를 더해갈 수밖에 없었다. 원죄라는 것이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천주교회의 신조 때문에 임신이 되는 순간 태아는 영원한 멸망의 정죄를 받게 되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영과 육,혼으로써 영원히 산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창 3:19)”라는 하나님의 말씀 따라 육,혼이 죽어 즉 분리되어 영이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것“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창 2:7)”을 의미한다. 이것은 누구든지 육체가 어려서 죽건 나이 많아서 죽건 죽는 것(영은 분리)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실과를 사람들이 못 따먹게 “화염검 두어 생명나무의 길(창 3:24)”에 지키게 한 것은 육체,혼이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육,혼이 죽어도 살아 있는 영의 상황은 저희가 음부(지옥) 가는 것과 천국 가는 것인데 구약에서는 언약된 말씀(모세 5경)과 십계명과 안식일로써 신약(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에서는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지금 우리 육,혼은 무조건 아담 이후 다 죽습니다. 하나님 약속으로 명하신 아담의 불순종의 선악과 때문에 육,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우리들의 영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혼,육이 어떻게 사느냐에 그 결과에 따라 음부와 천국에 영이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면 천국으로 생명책에 없으면 음부에 나뉘게 됩니다.

7-8살 때에 따라 육,혼의 정신세계(“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3, 막 10:15, 눅 18:16”)에서 그 이하의 어린이와 그 이상의 어린이를 천국과 음부로 나뉘게 되겠는데 7-8세 이상의 어린이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원죄라고 한 어거스틴의 비성경적인 오류를 그대로 받아들인 신학자들의 잘못도 하나님께서 묵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어거스틴이 또 하나의 질문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면 원죄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교인들의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것이“세례(영세)라고 불리우는 의식에 의해서 원죄의 정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로마(천주교)교회 지도자들의 답변에 뒤이어 역시 또 다른 질문이 들어 왔는데, 그것은 “세례(영세)받지 않은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참으로 더욱 끔직한 것이었는데, 즉 “세례(영세)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서 영원히 타는 지옥 불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세례(영세)를 미처 받기 전에 죽은 어린아이를 가진 부들에게 있어서 천주교회의 그러한 답변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당시 중세기에는 어린 아기의 사망률이 매우 높던 때였다.

자신들의 아기가 영원한 지옥 불에서 끝없이 고통당하고 있을 것을 상상하는 진실하지만 무지한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고뇌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것 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즉각적으로 교인들의 고뇌를 해소시킬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그래서 “연옥”과“림보”라는 기상천외한 것들이 발명되게 이르렀다.

연옥은 하늘도 아니며 지옥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지옥의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며, 림보는 천당은 아니지만 연옥이나 지옥처럼 불타는 고통은 전혀 없는 곳이다. 교회는 이러한 연옥과 림보를 교인들에게 소개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제시하는 그러한 해결책으로도 아기를 잃어버린 부모의 아픈 심정을 완전히 달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드디어“유아 세례”라는 의식을 만들어 내기로 결정하였다. 출산의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산모의 배 위에 신부가 물을 뿌리면서 이제 유아와 산모가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선언하는 유아 세례야말로 교인들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한 신학자의 잘못된 사상(어거스틴)이 오류에서 오류로 발전되게 되었는데, 결국에는 그러한 오류들이 로마교회(천주교회)의 정식 교리(a.d.1439 연옥설 확정)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오류의 행진


아퀴나스(1225∼1275)와 바벌라드 같은 신학자에 의해서 어거스틴(4세기)의 이론이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특히 16세기 초에 위대한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개혁자들이 교회의 부패와 오류에 대해서 대항하였지만, 천년에 걸쳐서 뿌리 깊이 박혀있던 오류의 근원을 송두리 채 뽑아내는 일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로마교회를 대항하여 개신교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어거스틴의 이론은 개신교회 중심부까지 들어와서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루터가 죽고 나서 그의 동료 개혁자인 멜랑톤(1497∼1570?)이 루터 교회를 예정론에서 끌어냈지만, 장로교회를 수립한 요한 칼빈이나 요한 낙스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받아 들였다.

그 후에 감리 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에 의해서 예정론이 거절되고,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 오류로서 지적되었지만, 여전히 현대 기독교 안에 이러한 가르침들이 너울너울 넘실거리고 있다. 이기적이고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오류들을 선호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거절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어거스틴과 그의 후예들이 수립한 로마교회의 거짓 교리들이 소위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교파에서도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채택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오늘날 진실로 믿음의 사람들에게 교파가 갖는 의미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어떤 교파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 보다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믿고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예정론과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그리고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십계명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도덕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도덕률 폐기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가르침이야말로 교회를 세속적이고 무능력하게 만들어 가는 장본인이다.

누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가? 마지막 시대에는 진리 위에 굳건히 서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구원에 관한 진리는 이렇게 믿어도 되고 저렇게 믿어도 되는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너희가 믿음 위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3)


근본적인 원인은 어거스틴의 원죄설


첫 번째 근본적인 오류는 성경에 없는 원죄에 대해 중세기의 어거스틴이 설정한 교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죄에 대하여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은 물려받은 죄뿐만이 아니라 천국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철저하게 부패한 성정을 가졌으므로 결코 죄를 안 지을 수는 없다는 가정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범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유전인자와 호르몬을 가진 탓으로 돌려 문제를 합리화시키는 기초를 놓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위에 밝힌 바대로 우리들은 나나 내나 누구나 육,혼이 죽습니다. 그 다음에 영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로써 대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여 어거스틴의 신학이 감행한 첫 번째 공격입니다.(1)

이런 식으로 어거스틴의 신학이 감행된 공격은 또 다른 진리의 곡해를 초래했습니다. 만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그의 원죄를 물려받는 것이라면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께서도 탄생하시자마자 그 죄를 물려받으신 것이 됩니다.

물론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분은 아무도 구원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죄인인데 어떻게 남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당시 로마교회는 동정녀 마리아는 아담의 죄를 물려받지 않았다는 무염시태의 교리를 창안함으로 그 문제를 말끔하게 처리해 버렸습니다. "로마교회의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마리아의 타락한 속성 대신에 아담의 타락하지 아니한 속성을 지니고 태어나셨다는 로마교회의 입장을 받아들인 옛날 이단 초대교회의 주장을 단순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담, 아브라함, 노아, 욥, 다니엘 등 성경에 있는 구약 사람들은 어거스틴에서 말하는 원죄 때문에 천국에 못 갔을까요? 아니면 갔을까요?

그러한 주장은 수많은 성경절의 진술과 상반될 뿐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죄를 이길 희망이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아담이 죄를 지은 후 태어난 사람 중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인류도 완전한 순종의 모본을 보인 경우가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의 유혹들에 감히 직면하려 하지 않으셨다면 어떤 인간이 그러한 유혹들에 대항하여 승리 얻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한 교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어쨌든 순종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라는 사단의 제의에 박수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여 어거스틴의 신학이 감행한 두 번째 공격입니다.(2)

어떻게 이러한 두 가지 오류가 율법에 대항하여 감행하는 "어거스틴이 계속되는 공격과 연관을 맺고 있을까요? 매우 이상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그 속성에 있어서, 도움이 심히 필요 되는 인류와 아주 동떨어진 분으로 묘사하면서도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속죄의 죽으심을 죽으신 것을 통해 그분의 순종을 포함한 그분의 거룩한 생애의 모든 공로들을 죄인들에게 입혀주실 수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매우 훌륭한 신학처럼 보이지만 좀 더 유의하여 잘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죄 사함"의 공로를 가리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부르고 있지만 성화(sanctification)의 문제는 고의적으로 특별히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로마 신학자들은 집요하게 주장하기를 “순종은 구원의 요구 조건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이며 오직 입혀 주시는 칭의의 공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가는 데 요구되는 유일한 입혀 주시는 "행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의 경험에 있어서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여 어거스틴의 신학이 감행한 세 번째 공격입니다.(3)

로마교회는 “입혀주신 의”에 초점을 맞추면서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속죄의 죽으심이 구속사업을 마치신 것으로 여기며,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온전한 순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하는 전부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이 죄인을 위한 속죄사업을 마치신 것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돌아가심은 온전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며 흠 없는 어린 양을 드리는 일은 영원히 끝났지만 최종적인 구속 사업은 그분의 보혈이 지성소에 뿌려져서 죄악의 기록들이 도말(누구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음)되기 까지는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의 성소에서 수행되던 표상을 성취하시려고, 그분 자신의 피로 봉사하시기 위해 하늘 성소로 돌아가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그 구속 사업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주요한 초점은 지상성소의 봉사는 오직 죄에 대한 용서만을 제공할 수 있었지 죄짓기를 멈추게 하는 능력은 결코 제공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과 염소들을 제사로 드리는 것이 어떤 사람을 결코 완전케 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1) 그와 반면에, 바울은 하늘 성소에 계신 참 대제사장(예수님만이)이 죄들을 제거하시고 사람들을 온전케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여기에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구속 사업이 그렇게도 필요 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죄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기록책(녹명책)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생으로부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이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어거스틴 신학"은 구속 사업이 십자가에서 끝났으며, 이제는 더 이상 매년마다 "지성소"에서 하는 하늘의 대제사장의 봉사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성도들을 성화시키는 어떠한 필요나 성화나 완전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 모두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두째 칸에서의 봉사를 부인함으로써 "어거스틴 신학"은 우리의 잘 못된 생각으로 유도하여 법궤의 속죄소 밑에 자리한 율법(모세 5경, 십계명, 안식일, 할례)의 그 보다 더 높여진 위치에서 돌려버립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경험에서 성화(sanctification)가 필요 없다고 하는 저들의 주장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아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율법은 구원의 원대한 계획에 있어서 아주 미미한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여 어거스틴의 신학이 감행한 네 번째 공격입니다.(4)

그러면 하늘성소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완전케 되는 계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대부분의 "어거스틴의 신학자들"은 육체 가운데 있으면서 죄를 완전히 이기고 승리한다는 가르침을 부인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란 그들이 태어날 때 함께 가지고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야 그들이 변화되어서 모든 타락한 몸과 마음이 제거된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견해를 볼 때에 왜 성화의 문제가 그들에게 어설프게 취급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만일 모든 죄를 극복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사람이 정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어떻고 어떤 죄들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셔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 집니다. 그렇지만 어떤 죄가 얼마만큼 용납된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이길 수 없는 죄들을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어거스틴의 신학”이 그토록 주장하던 왜 예정설이 아니고 선택이 그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어떤 사람이 자신이 좀 더 믿음을 가지고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죄를 극복할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어리석게도.
성경에는 어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종류의 죄 짓기만을 멈추거나, 혹은 그가 짓는 죄들의 양을 감소시킨다는 언급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그녀가 범하고 있는 간음의 양을 어느 정도 감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제가 어떤 죄들은 극복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제 생애 가운데서 그 죄들을 짓지 않으려고 구태여 애쓰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서도 역시 그 죄를 용납하실 것이라고 제 자신을 속도록 내버려 둘 것입니다. 또한 저의 가련한 인간적 속성은 제가 포기하기 싫은 어떤 죄를 극복할 수 없는 죄로 여기게 되기가 얼마나 쉽겠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주시는 능력 안에서 어떤 죄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아차리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죄들은 이길 힘을 주실 수 있고 또 주실 것이지만(아마 뿌리 깊이 박히지 않은 죄들은), 또 어떤 죄들은 이길 힘을 주실 수도 주시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논리 정연한 생각 같이 보입니까? 그 모든 개념은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상반됩니다. 죄를 취급하는 유일한 길은 죄짓기를 멈추고, 죄를 내버리며, 그 죄에 대한 승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죄를 지어야만 한다는 상식 밖의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인이고 불순종뿐만 아니라 사단이 옛날부터 일삼아 온 거짓말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신학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여 감행한 다섯 번째 공격입니다!(5)

“은사중지론(cessation theory)”은 여러 가지 수많은 책들을 만들어 내면서 오류들 중에서 어거스틴이 주장 하였는데 성령님이 사도행전의 초대교대에서 있었던 예언, 방언 등의 은사를 졸지에 훼방하는 이론으로 현재까지 가톨릭은 물론 일부 개신교까지 예언, 방언을 사단이라고 하여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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