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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설교와 사명
조회 549 추천 0 비추천 0 2019-01-10 18:33 작성자 : 정목사
목사의 첫째 사명과 역할은 설교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상황 속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는 단순히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인격과 삶이라는 그룻 속에 담겨서 전하여지기 때문에 설교와 설교자는 따로 떼어서 생각 할 수 없다. 목사의 기능이 설교인 한에 있어서 목사가 된다는 것은 한평생 설교자의 삶이란 의미이다. 물론 목사의 역할 중에는 교육과 상담, 심방도 있으나 그것도 엄밀히 따져본다면 설교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필자는 여기서 설교가 무엇인가라는 문제보다 설교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설교자로서의 목사의 인격과 삶의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원론적으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누가 설교자가 되는가

설교는 누가 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답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설교는 말씀을 잘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설교는 반드시 장립받은 목사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가능하기는 하지만 설교가 평신도의 사역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 이유는 설교의 일차적인 작업은 신학적 작업이요, 해석학적 작업이어서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몇 가지 체험담 정도로 이해하면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경을 읽고 간증을 하는 것은설교와 동일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아무래도 정상적인 교육과 정상적인 신학교육을 받아서 복음의 열정과 성경해석학의 본질을 아는 전문가, 교회가 인정하는 노회에서 정상적으로 장립을 받은 목사여야 한다. 물론 노회에서 장립을 받는 것이 영적 지도자가 되는 조건의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러한 절차가 있는 것은 교회의 덕과 질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선택된 사람에 의한 선포이다. 설교자자신은 메시지의 근원은 아니다. 메시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나 설교자는 메시지의 통로이다. 메시지는 인격체를 통하여 움직인다. 따라서 설교자는 전달자일뿐이다.
설교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하여지는 것이므로 설교자는 좋은 통로가 되어야 한다. 만약 설교자가 좋은 그릇이나 통로가 되지 못한다면 도리어 메시지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이 되기 쉽다.
그러면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들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우선 지난 세기의 대 설교학자인 죤  브로더스(john 4. broadus)의 설교자 자격론을 중심으로 해서 몇 가지를 생각하고자 한다.

설교자에 있어서

첫번째로 물어봐야 할 것은 소명(召命calling)의 문제이다. 물론 소명이란 말의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을 의미한다. 그 소명은 반드시 목사에게만 국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목사 또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되겠다는 불타는 소명이 요구된다. 소명감이 없는 사람은 목사가 되어서도 안되고 설교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사람이 하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롬1:1)고 고백하였다.
소명은 내적인 동시에 개인적이다. 그리고 설교자로서의 소명은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총의 사역이다. 그것은 출신성분의 높고 낮음이나 학문의 유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것이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10:15)라는 바울의 메시지는 설교자는 곧 소명자여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복음운동은 바로 생명운동이며 진리운동이기 때문에 소명을 첫번째로 문제삼게 된다. 소명자는 자기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이다. 하나님의 소명이란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환상을 본다든지 그의 음성을 들었다든지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방법으로 당신의 종들을 부르셨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다.

소명이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깨닫되 성경에서 요구하는 복음증거에 대한 열정을 자기에게 향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교자의 생명은 소명의식에서 출발한다.

둘째로, 살아있는기독교체험이 있어야한다.

목사가 되는 요건으로써 신학공부를 마치고 교회가 요구하는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목사안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사역을 직업적으로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외형적인 절차만을 통해서 설교자가 된다면 복음운동은 생명없는 화석(化石)이 될수밖에 없다.
설교자는 우선 자신이 구원의 확신과 뜨거움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살아있는 체험이 필요하다. 자신이 영적 체험이 없이 설교자가 되는 것은 그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그 이유는 생명운동은 살아있는 체험을 가진 그릇인 설교자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자기도 확신하지 못하는 내용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증거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기차가 가려면 레일도 필요하겠지만 불도 있어야하는 이치와 같다. 동력이 없는 객차는 수백대가 있어도 갈 수 없다. 기관차가 있을 때 기차는 움직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무 영적 체험이 없는 사람도 설교자로서 일한 사람이 많다. 그들은 뜨거운 영적 체험을 하기까지는 결코 하나님의 일을 생명력있게 감당치 못하였다.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는 질병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영적 경험을 하기전에는 활기 없이 일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ay)도 실상 1725년에 안수는 받았으나 1738년에 와서야 그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던 올더게이트(aldegate)경험으로 인하여 그의 생애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설교자들 중에는 나름대로의 영적 경험이 없지는 않지만 자기가 가진 영적 경험을 마치장작불을 계속 불태우듯하지 못하고 한 때의 경험으로 묻어두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설교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면서 심령이 냉냉해서 식어지지 않도록일깨워야 할 것이다.

사무엘 맥콤(samuel m,comb)은 "어떤 유창한 웅변이나 우아한 태도, 그리고 설교학의 기술로 영적인 실존의 생동적이고 내적인 경험의 결핍이나 손실을 보상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또 호이트(a.hoyt)도 "세상은 영적생활의 능력에 민감하다. 사람들은 영적인 설교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열고 듣고 신뢰하며 따른다"고 말하였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니만큼 성경을 기록하신 그 성령께서 설교자와 함께 역사할 때만이 생명있는 설교가 되는 것이다.

셋째는 신학의 수립과 끊임없는 연구활동이다.

앞서 말한대로 설교는 첫걸음부터 신학적 작업, 성경해석학적 작업이 기초가 되어야하느니 만큼, 신학의 수립이 안된 사람은 설교자로서 위험하다.
앞서 설명하기를 기차가 앞으로 가려면 불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불이 있어야하되 또한 레일이 있어야 한다. 분명한 표준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설교자는 우선 자신이 성경해석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리스쳐(richard lischer)가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언어"라고 표현했듯이 설교자가 아무리 자기는 신학과 무관하다고 할지라도 모든 설교에는 반드시 설교자의 신학이 나타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신학수업을 확실히 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바른 진리 운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설교자는 신학 연구를 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자기를 개방하고 연구?개발하는 연장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역자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을 요구하기 때문에 연구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다. 설교자가 설교와 기술을 익히고 요령을 터득하는 전문기술자로 전락하거나 남의 설교를 도용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한국교회의 강단은 큰 문제일 것이다. 설교자는 자기의 목회적 생명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자기를 개발하구 연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넷째는 천부적 재능의 개발이다.

효과적인 설교자가 되기 위한 또 다른 조건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개발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재능을 가진것은 아니다. 또 각자는 나름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천부적 재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의 저명한 설교자였던 헨리 비쳐(h.w. beecher)는 천부의 재능을 개발한 예이다. 그는 말하는 데 서툴렀고 논리적 사고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수학선생이 논리적 사고를 잘 지도하고, 웅변선생이 정확하게 말할 때까지 반복훈련을 하게 함으로써 후일 비쳐는 미국의 강단의 거성이 되었다. 천부적 재능의 개발은 모방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의 장점을 발견해서 육성시키는 것이다.

다섯째, 설교자는 언제라도 건강한 신체를 가져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병약한 사람을 통해서도 그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일하도록 하신다. 그러나 대부부의 경우 건강한 사람이어야 설교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 앞에 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육체적 균형은 정신적 정확성과 생동에 유익을 준다. 좋은 건강은 좋은 성격과 긍정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낙관적인 인생관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열정과 신학적 지식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의 연구과정은 물론 실제 설교를 하는데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운동으로 체력을 보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운동 가운데는 산책이 가장 좋다. 산책을 하면서는 사색도 할 수 있고 지역사회 사람들과 좋은 교제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산책은 3중의 효과를 가져다 준다.

여섯째로 설교자는 성령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

성령의 도움없이 목회하는 것은 목사에게 욕이 된다. 설교자에게 필수적인 것은 성령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이다.
성령은 설교자의 삶 전체를 도우고 인도하신다. 성령은 성경연구를 인도하고 본문과 자료의 선택 및 준비를 인도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설교에 능력을 주시고 영적인 승리를 주신다.
설교는 설교학이나 설교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설교자의 역동적인 힘은 자기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설교는 곧 인격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을 매개로 하여 선포되어진다.
설교는 마치 음악연주에 비교할 수도 있다. 연주에는 적어도 악보가 있어야 할 것이고 악기가 있어야 하고 연주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좋은 연주는 악보대로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 한편 연주자에게는 연주자로서의 해석이 있고 끊임없는 자기훈련이 있어야 하듯이 설교자도 끊임없이 자기를 훈련해야 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평소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헨리 비쳐가 설교하고 강단에서 내려오자 어떤 성도가 "오늘의 설교는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비쳐는 "40년이 걸렸습니다"하고 대답했다 한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즉 설교는 설교자의 삶 전체가 준비여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는 설교자가 토요일 몇 시간을 성경과 주석과 펜과 노트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작품이 결코 아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삶 전체가 투영되는 작업이다.
요즈음 흔히 말하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도 설교자의 인격 전부에서 나오는 것이다. 청중들은 설교자가 말하지 않는 부분도 설교자의 삶을 통해서 그 설교의 진가를 알아차린다. 앞서 설교자를 음악가에 비유했는데 어떤 바이올린 연주자가 어떤 소곡을 연주했다고하자. 가령 그 곡을 서너번의 연습으로 훌륭히 연주해냈다고 할 때에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 연주자가 몇 번의 연습으로 훌륭히 곡을 연주했다는 의미는 그 곡을 연주하기 이전에 수십년 동안 그 악기에 대해서 익숙해 있는데다 무슨곡을 주든지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음악과 음악 연주자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음같이 설교와 설교자도 서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설교는 그 설교자의 신앙과 인격과 생활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설교원고를 주고 설교하라고 해도 설교자마다 모두 다른 감화력을 주는 것은 설교는 말이나 글이 아니고 설교자의 인격과 신앙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학자 가십(gossip a.j.)은 "인기높은 설교의 매력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고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소위 인격이란 이상한 힘이 있는 것 같다. 결국 설교는 설교자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인격 자체여서 거기에 힘이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즉 설교는 그 사람 자체와 결부되어 그 인격에 배어나오는 것이다.
호이트(a. hoyt)가 말한대로 하나님은 일(설교)보다 일하는 사람(설교자)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설교의 좋고 나쁨은 설교자 자신의 문제이다. 설교자자신의 내적인 경험 없이는 그리스도는 설명되지 않는다. 구원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의 메시지를 증거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청결한사람이어야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의 은사였던 고 차남진 박사는 강의시간에 늘 이런 말을 했다. 즉 "머리에서 나온 것은 상대방의 머리까지 들어가고, 가슴에서 나온 것은 상대방의 가슴까지 들어가고, 발에서 나온 것은 상대방의 발까지 전달된다 "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설교자가 어떤 인격과 어떤신앙과 어떤 삶을 살았는가가 중요하다는 의미겠다.
흔히 청중은 목사의 믿음의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도 설교자의 감화력은 그의 인격과 삶의 내용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자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깨우침을 당하고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설교자도 인간인지라 낙심하고 실수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성직자로 부르는 이유는 그 자신이 거룩해서가 아니고 그 일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성경에서 말한대로(고후4:7) 질그릇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속에 영원한 보배를 담고 있기에 귀하다는 의미이다. 또 설교자의 인격과 삶이 귀하다는 또 다른 이유는 설교자는 말씀을 맡은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 그 진리를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가 설교자의 신앙과 인격의 표명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설교자 자신의 사상이나 체험 또는 타고난 인품의 표명이라는 뜻이 아니다. 설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의 말이 성경의 말씀을 정리하여 이뤄지고, 성경의 말씀이 설교자의 말을 통해서 말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즉 앞서 말한대로 설교란 설교자의 인격에 하나님의 말씀의 메시지가 녹아들어 한몸이 된다. 즉 하나님은 설교자의 신앙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설교자의 삶

앞에서 설교자의 인격에 대해서 말한 바 있다.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설교자의 인격은 그의 평소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물은 그 자체의 수원보다 높이 올라갈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설교도 결국 평소에 그 사람이 생활하고 있는 그 자체이다. 날마다 저급하고 유치한 오락과 세상 연락을 즐기다가 값자기 설교자로서의 위치에 돌아온다는 것은 이상한일이 아닐 수 없다.
설교자는 주일 하루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일주일 전부 그리고 삶의 전부(totality of life)가 중요한 것이다. 만약 설교자가 일주일에 하루만 거룩성을 유지하고 나머지 6일은 세속적인 삶과 세속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삶이란 이원론적(二元論的 : dualistic) 삶이 될 것이다.

설교자의 이런 삶은 결국 성도들로 하여금 은연중에 이원론적 인 삶을 살도록 유도하고 방치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나무는 열매로서 알듯이 설교자의 메시지는 그 생활로서 알수가 있다.
흔히 설교자에게는 골방과 책방과 심방의 3방이 있다고 한다. 이는 기도생활과 연구생활과 성도들을 돌보는 생활 세 가지를 의미한다. 성공적인 설교자치고 골방의 생활이 없었던 사람은 없다. 골방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설교의 생명이다.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영감에 넘치는 메시지를 들을 수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설교는 하나의 경험담이나 시국강연처럼 되가 쉽다.
성령의 입김에 접하지 않는 설교자의 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증거될 수 있는 것인가 함이다.

고 박윤선 목사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한평생 기도로 일관하신 어른이다. 기도하면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그는 설교를 준비할 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매달리기도 하고 힘있고 뜨겁게 기도하였다. 진리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아서 확신이 서기까지 기도하던 사람이다.
연구의 생활은 앞서 말했기 때문에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설교자는 삶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와 경건서적을 연구하는 시간적 여유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언제나 자기의 지식을 소비해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보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혼자서 연구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서든지 겸손히 배우려는 자세 또한 필요한 것이다.

심방은 목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것 역시 설교와 연결되어 있다. 그 이유는 청중의 삶의 형편과 자리를 아는 데서부터 바른 설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정황(convext)을 모르는 설교는 허공을 치게 된다. 활시위를 당겨서 활을 쏠 때 과녁을 향해 쏘아야지 허공을 향해서 쏠 수는 없다.
스티븐슨이란 사람은 적어도 서른 살이 되기 전에는 신학교에 입학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아마그 뜻은 인간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인간에게 교훈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질을 살려서, 기질을 넘어서

끝으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듯이 성격과 기질도 모두 다르지만 그래도 설교자는 그의 장점과 약점을 잘 알아서 장점은 개발하고 약점을 수정 보완하는 끊임없는 자기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다혈질인 사람, 어떤 사람은 우울질적인 사람 등 그 기질이 다양하다. 하지만 자기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만으로도 발전의 가능성이 있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약한 부분이 있는 줄 알았기에 강하다는 것을 말했다.

일찌기 죤 스타트(john w.stott)는 설교자의 모습중에 청지기, 반포자, 증인, 아버지, 종의 모습을 들은 바 있다. 어쨌든 목사라는 말은 곧 설교자란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되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목사 곧 설교자의 삶은 위에서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목사는 설교자일 뿐 아니라 또한 남을 가르치는 교사의 직무도 동시에 갖는다. 그러나 원리면에서 둘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필자는 이 글에서 설교자로서의 삶에 대한 원칙적인 몇 가지를 제언해본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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