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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불멸
조회 424 추천 0 비추천 0 2018-07-07 18:40 작성자 : 트루 김

영혼불멸, 불사성 (immortality / athanasia / aphtharsia)

     i. 이 개념은, 인간이 죽은 후에 모종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신앙을 가리
킨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후에도 인간의 영혼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
다.  민간 신앙에서나 후대의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 영혼과 인격의 구분을 중요
한 것으로 여기지 않지만, 사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 
신학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헬라 철학에서는 이 영혼의 불멸을 인간 영혼의 이
성적인 요소에만 국한시키고,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를 가리키지는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헬라 철학에서는 불멸성은 영혼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신적 본질 중의 한 가지로 취급되었다.  즉, 영혼은 육체의 죽음 이
후에 그 존재를 지속할 뿐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 나기 전부터 그 존재를 향유
해 왔다는 것이다<참조: 영혼선재설>.  그런데 이와 같은 영혼의 신적 속성에 
관한 가르침은 기독교 신학과, 특히 구약성경의 주해와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양립할 수 없다:  (1) 창조에 관한 신앙,  (2)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다
는 영-육 이원론,  (3) 완전하고 실제적인 인격적 존재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는
사자의 부활에 관한 신앙.  그러나 기독교 교리는 헬라 철학과 히브리적 사고방
식을 조화시키려교 시도해 왔다.  그 존증은 다음과 같다:  (1)  각각의 영혼은
창조된 것이다.  (2) 영혼은 사후에 어떤 종류의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에 들어가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3) 최후의 심판 때에 영혼은 다
시 육체를 입게 되고, 그 영원한 심판의 결과에 따라 영속적인 상태를 부여받게
된다.  전통적으로 개신교와 가톨릭은 단지 중간 상태의 양상에 대한 견해만이 
다를 뿐이다.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영원한 형벌, 혹은 지옥에 관한 교리의 해석
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육체적 부활의 교
리와 중간 상태의 교리를 부정한다.  그러나 신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일치하게 
이러한 자유주의 견해를 비성경적이라 비판하며, 기독교 신학의 정통적인 교리
로 믿어져 왔던 육체의 부활을 다시 확립하였다.  신개혁주의 신학에 의하면, 
육체의 부활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의 확신을 상징하고 있다:  (1) 인간은 영과 
자연(육체)의 통일체이며,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2) 인간의 이 
땅 위에서의 삶은 그 삶의 의미를 속속들이 다 규명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역
사 위에서 인간 존재의 삶을 완성시키시고 성취하신다.  (3) 그 불멸은 인간의
타고난 자질이나 권리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행위이시다.
     ii. 성서:  문자 그대로는 불후성을 의미한다.  일단 여호와와 죽음 사이
의 관계성이 확증되면 죽음에 대한 승리의 소망이 있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통치하는 곳에는 생명이 지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여호와께서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고칠 수 있다면 그는 또한 일단 죽음의 역사가 끝나
면 죽음에 대해서도 그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여호와가 살아 있는 신이라는 
단언은 구약성경의 중심적인 주제이다(시 18:46, 42:2, 84:2, 렘 23:36, 호 1:
10).  그의 영원성에 대한 확증은 그의 존재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살아 있는 
하나님은 죽은 우상에 불과한 이교적인 신들과 대립되며(왕하 19:4,16, 시 106:
28, 렘 10:11) 유일한 인간들과도 대립된다.
     더구나 여호와가 소유하고 잇는 생명은 인간에 대한 그의 충실성 및 인간
과 그의 계약을 이행할 때 그가 보여 주는 생명의 근원이다.  따라서 여호와는 
병과 죄에 의해 약해진 생명을 회복시킬 수 있다.  이것은 소생시키는 행동이며
hayah란 어근의 도움을 받아 표현되고 있다(욥 33:19-26, 시 30:2-3, 56:13, 
71:20, 143:11).  일단 죽음이 그의 역사를 완수하고 나면 아무것도 여호와의 
이러한 재생하는 힘을 막지 못한다.  구약성경은 엘리야와 엘리사에 의해 생명
이 소생된 사람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  즉 사르밧 과부의 아들(
왕상 17:17-21),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18-37) 그리고 엘리사의 유골과 접촉
하여 생기가 되살아난 익명의 사람(왕하 13:20-21) 등이 그 예이다.  이 예들에
있어서 부활은 최후의 부활에보다는 병의 치료에 더 가깝다.  그 부활들은 몸이
아직 흙으로 화하지 않았을 때인 죽음 직후에 일어났으며 다라서 생명의 연장에
불과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보다 결정적인 승리는 어떤 특정한 개인들의 승천
에서 나타난다.  이와같이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10-11)는 죽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돌림을 받았다.  위경 전승은 신 34:5을 데리고 간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모세도 이와 유사한 운명을 당했다고 기술한다(참조. 모승 11:9 이하)
이러한 예들은 보다 일반적인 부활에 대한 전조들이라고 생각되어져 왔다.
     불멸성에 대한 신앙은 다음과 같은 두개의 주류에서 기원되었다.
     (1) 당시 널리 유행하고 있던 소생 가능성에 대한 관념.  이스라엘인들은 
자연의 생명을 상징화한 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나안적 신앙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실한 자들은 이교적인 죽음과 부활 관념과 자
신들을 연결시켰다.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그들 자신의 종교에서 사용된 어떤 
표현들은 가나안인들의 신앙으로부터 각색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호 6:1 이하는 신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이교적인 숭배 의식의 예배
적 주제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야긴 왕에 대한 탄식도 마찬가지로 가나
안의 제의식으로부터 모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렘 22:18).  이스라엘은 그의 
이웃들과 함께 왕의 불멸성에 대한 신앙을 공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겔 
34:24, 37:24).  물론 이러한 생각은 극히 조심스럽게 탐구되어져야 하기는 하
지만 말이다.  반면에 자연에 대한 이러한 신비적인 태도-이러한 태도는 가나안
종교의 본질이다-가 영원성에 관한 사고에 있어서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대단
히 조심스럽게 하였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아마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이러
한 생각의 밑바닥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가 부활로써 제시되는 어떤 이미지
가 깔려 있다.  이미 언급된 호세아의 본문 이외에도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37
장)도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본문이 죽은 자의 해골의 소생과 무덤에서 
나옴을 기술할 때 취하고 있는 정확성으로 보아 죽은 자와 관련된 어떤 정확한 
관념들이 이러한 이미지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여호와의 
종의 네번째 노래에는 깊고 불멸적인 생명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생명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서 그가 받아들인 그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대가로 그에게 허락되어 있다(사 53:8,10).  단 12:2에서 보면 부활이 비교적 
많은 사람들에게로 확장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직도 모든 사람의 부활
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부활에 관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 부활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보상이 따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형벌이 따르는 양면성을 
가질 것이다.  부활은 마카베오 전쟁으로 인하여 가치가 하락하게 되었으며 정
상적이라면 이생에서 보상을 받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의 순교에 의해 제기된 신
앙상의 문제에 의해 가치가 하락하게 되었다.  부활은 분명히 보복의 한 형태로
써 간주되었다.  사 26:19에 나타나는 주의 죽은 자들은 아마도 순교자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부활은 보복의 한 표현일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세상 통치의 확장으로 인
한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결과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여호와가 왕이 되면 죽음
은 영원히 멸하여질 것이다(사 25:8).  그리고 높은 군대가 처벌될 것이며 그와
함께 죽은 자를 스올에 가두고 있는 리워야단과 다른 세력들이 처벌될 것이다(
사 24:21, 27:1 이하).  동시에 여호와가 빛난 이슬(사 26:19)을 땅에 흩으실
것이다.  따라서 부활은 첫번째 창조보다 더 완전한 새로운 창조와 동일시된다.
시 22편의 저자에게 있어서도 역시 부활은 여호와 통치의 승리의 일부를 형성하
고 있다(29-30절).  이스라엘적 신앙은 아마도 부활 관념에 대한 몇몇 측면에 
있어서, 즉 예를 들어 부활을 보복 및 메시야적 대망과 연합시키는데 있어서 이
란의 종교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반면 영혼의 불멸성에 근거된 영생에
의 소망은 구약성경에 대하여 전혀 이질적이다.  그리고 이란 종교의 기초를 형
성하고 있던 세상의 파괴와 재생에 관한 우주적인 신화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힘과 정의에 대한 신앙보다 훨씬 덜 중요하였다.
     (2) 두번째로 널리 유행하던 사상의 특징은 부활의 가능성들과 양태들에 
관한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의존하며 하나님과의 
교제 이외의 어떤 다른 확신도 요청하지 않는 신앙적인 문제이다.  신비적이라
고 일컬어질 수도 있는 이러한 태도는 여러 개의 시편들에서 나타난다.  시 16
편의 저자는 죽음 후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
는 여호와와의 교제가 대단히 강한 실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죽음 후에도 소멸될
수 없었다.  여호와는 살아 계신 신이기 때문에 이러한 교제도 역시 그 시편 기
자에게 있어서는 죽음 후의 생명이다.  부활에 대한 언급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는 않지만 시 17:15에도 유사한 소망이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 49편과 73편에서 볼 때 그 시편 기자들은 어떤 특정 소재들을 하나님에게로 
들어올림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시 49
:15, 73:24에서 취하다는 뜻의 동사를 사용한 것을 참조하라).  시 49편의 저
자는 그가 의롭고 충실하였기 때문에 죽음이 그에게는 불경한 자들에게 임할 엄
청난 파괴력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불의하여 때이르게 죽는 죽
음을 두려워한 시 73편의 기자는 비록 죽음이 임한다 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하
나님과 그의 교제가 끝날 수는 없으며 어떤 힘도 그것을 파괴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롬 8장에서 사도 바울에 의해 표현된 승리적 신앙, 즉 어떤 것도 그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는 신앙은 이미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동일한 태도가 욥 19:26에서도 나
타나고 있다.  여기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지상에서의 보복이나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확신이다.  볼 것이라는 용어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교제-일반적으로 제의적 의식을 통해 교제됨-를 의미한다.  욥의 신앙은 하나님
과 그의 교제가 언제나 존재할 것이며 판단과 추론에 의해 모순되는 것처럼 보
일 때에도 그렇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
     부활 관념을 살아 있는 신앙으로 변형시키는 데 가장 강력하게 기여한 것
은 이러한 깊은 종교적 경향이다.  보복의 개인주의적 이론이 명백히 승리하게 
되자 불멸성과 부활에 관한 관념은 유대교에서 점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
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이의없이 받아들여지지는 않
았다.  그러한 생각들은 분명히 집회서.유딧서.토빗서.바룩서 그리고 마카베오
상(참조. 외마상 2:49,70) 등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  그리고 사두개파는 여전
히 이런 입장에 충실하게 남아 있다.  외마하 7:9 이하, 에녹서의 비유들, 바룩
서 그리고 열두족장의 유언(특히 유다의 유언) 등에서 확증적인 태도가 표현되
어 있다.  사 26:19과 단 12:2의 용어들은 다시 사용되어 명백히 되어 있다.  
비록 부활의 양태와 장소 및 부활한 몸의 성격에 대하여 이 기록들에서 여러가
지 차이점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쿰란의 본문들은 의로운 자들의 부활(1qh xi.12)과 하나님과 천사들의 빛
나는 세상에서 끝없이 누리는 생의 기쁨(1qs iv.7-8)에 관해 말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유대교의 기록들에서 보면 부활 관념이 하나님을 닮은 영혼들의 
불멸성에 관한 관념으로 대치되어 있다(외지 3:1 이하, 9:15, 마사).  일반적인
유대교는 구약성경에서 유전된 신앙과 희랍적 관념 또는 희랍-이란적 관념 사이
를 조정하였다.  에녹서 22장에서 보면 죽은 자들이 영혼들이 스올에서 네개
의 구획으로 나뉘어져 수용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미 하나의 심판 형태이다.  그
리고 그 영혼들은 부활의 날에 육체적 형태를 다시 입으려고 기다리는 동안 독
립적 존재를 가지고 있다.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교리를 부활에 관한 교리(이
것은 때때로 원초적인 관점으로 인도된다)와 동일하게 결합시키는 것은 에스드
라 하서(에스드라 4서)에서, 특히 제7장에서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도 유사한
태도가 발견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육체의 부활에 관한 명백한 단언 이외
에도 불멸성 및 죽음 후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한 신앙이 발견된다(참조
눅 16:24).  하지만 예수는 죽음 후의 생명에 관하여 말할 때 살아 계신 하나님
의 실체성과 전능함을 강조함으로써 구약성경의 근본적인 단언들을 재결합시키
며 당시의 유대교적 신앙을 무시한다(마 22:23, 막 12:26).
     iii. 최근의 연구:  소멸이나 사망에서의 면제를 말한다.  불사성이란 희
랍 종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신적인 존재들과 인간을 구별짓는 특징이었다.  플라
톤과 그밖의 희랍 사상가들이 인간을 속에 있는 이성적인 생명의 원리(영혼)에 
불사성을 부여한 것은 자아는 어떤 형태로 사망을 면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육체와는 달리 영혼은 본래 신적인 것과 유사한 것이며 신의 영원성과 
불멸성(aphtharsia)을 공유한 것으로서 신의 행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것
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도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불사성이 a. 하나님
의 특성으로, b. 하나님의 영적 생명을 공유한 존재로서의 부활한 인간의 본질
을 나타내는 특성으로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후기 기독교 사상가들은 불
사성의 존재의 가능성을 인간의 본래의 불사성, 즉 죄 때문에 상실하였으나 그
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된 불사성에 대한 능력에 그 근거를 두었다.
     1. 희랍철학:  희랍 종교가 신들을 불사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하였고 또한
불사성을 신의 존재 방식의 결정적인 특성으로 간주하긴 했지만 불사성이라는
추상적인 용어는 플라톤에 의해 비로소 통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플라톤
은 처음에 이 말을 우주적 목적들을 지닌 영혼(psuche)을 우주 안에 있는 영원
하고 스스로 움직이는 질서 운동의 근원이라고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플라톤
에 의하면 영혼은 불변적 사유적인 이데아의 영역(존재)과 가변적.감각적인 가
시적 실재의 영역(생성)을 중재하는 신적인 원리이다.  그러나 영혼은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전자와 가
까운 것이다.  이와 같이 몇가지 형태들로 나타나는 영혼은 우주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는 영원한 생명의 원리로서 시작도 끝도 없으며 "자존하는 것이며(age-
netos),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이같은 우주적 관점은 인간에 대한 관점을 수반하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부분적으로는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었다.  인간 존재는 이성
적 영혼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또한 열등하고, 죽을 수밖에 없으며 감정적인 영
혼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상의 육체를 활동시키는 즉 사용하는 존재이
다.  하지만 지상의 육체와의 이같은 연합은 영혼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추방상
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불멸의 존재에게 적절하며, 영혼이 마땅히 추구해
야만 할 천상의 명상의 생활로부터 이탈되어 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  이같은 
불사성에 대한 플라톤의 학설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가지 점을 말해 준다.  
a. 육체는 본래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과는 성질이 다른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자아를 형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b. 육체는 사멸될지
라도 영혼은 그 존재에 관한 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c. 영혼은 영원하
고 지적인 존재로서의 삶에 적합한 변함없는 신적인 명상의 생활을 성취함으로
써만 그의 부여받은 본성을 완성한다.  이와 같이 플라톤의 불멸설은 영혼의 불
멸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영혼의 본질과 영혼의 이상적 상태를 아울
러 상술하고 있다.
     주전 1세기에 재발견되기까지 이러한 플라톤주의자들의 불멸설은 철학계에
서는 엄격히 한정되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영혼이란 특정한 
유기체를 형성하는 원리를 의미하였기 때문에 그는 영혼과 그 영혼이 활력을 주
어 움직이게 하는 육체가 분리된다는 주장을 부인하였으며 따라서 영혼은 유기
체보다 선재하거나 생명을 갖고 있는 유기체가 죽은 후예까지 살아 남는다는 것
을 부인하였다.  그는 영혼의 최고의 측면인 능동적 이성에 불사성을 부여하
였는데 이것은 "분리될 수 있고, 감정이 없으며, 순수하고...불멸하며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은 모든 개별적인 영혼들을 초월한 것
으로서 모든 개체에 공통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 개별적으로 살아남
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능동적 이성 안에서 능동적 이성과 더불어 사는 존
재로 그들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불사의(즉 신적인) 생명을 갖게 되는데 여기서
능동적 이성이란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신적인 어떤 것을" 말한다.
     희랍 학파들 중에서 에피쿠로스 학파는 영혼이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멸되
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개별적 영혼을 사물들을 형성하는 능동적 원
리인 불같은 영의 불꽃이라고 보았던 스토아 학파는 영혼은 각각의 우주의 주
기가 끝났을 때, 즉 사망하였을 때 그 본래의 구성요소로 환원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덕을 실천함으로써 현자는 만물들 속에 들어가 그들을 지배하는 신적인 
이성(운명)과 하나가 된다.  이와같이 영혼이 신성과 가깝다는 기본적인 생각은
계속 존속되어 왔다.
     2. 헬레니즘 시대의 종교:  후기 헬레니즘 시대의 사회-문화적인 상황은 
개인의 고립차가 증대되고, 지상의 생활은 외부의 세력들과 심지어 적대적인 세
력들, 즉 우연, 운명 및 별들에 의해서 조정된다는 염세적 신앙 때문에 불사성
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멸의 약속은
곧 인간이 신적인 천상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운명과 본성의 매카니즘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밀의종교의 제의들은 사후가 아니라 신이나 여신에
대한 제의에 참여하는 순간에 불사성을 얻게 된다고 약속함으로써 불사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였다.  신플라톤주의는 결정론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으며 우주질
서의 선을 주장하는 한편 영혼의 불멸성을 성취하는 방법으로서 지적 훈련과 도
덕적 훈련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영지주의에서는 염세적 종교의 경향이 계속되
어 그 절정에 달하였다.  영혼불멸은 오류와 죄악이 가득찬 이 세상과는 별개의
곳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영적 우주에서 떨어져 나온 한 요소로서 간주되었다.
     3. 신약:  불사성이란 말은 신약에서 세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 중의
한 경우에 이 말은 하나님을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는" 분으로(딤전 
6:16) 묘사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희랍의 관례를 따른 것으로서
여기서는 불사성의 신성의 탁월한 속성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디모데전서에서
는 불사성은 본래 하나님께만 속하는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플라톤과 희랍
적 전통을 따르는 그밖의 학자들은 불사성을 한 계급의 존재들(영혼을 포함해서
)이 갖고 있는 하나의 속성이라고 본 반면 디모데전서의 기자는 이것을 다른 종
류의 존재들과는 다른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또 다른 구절에서는 불사성이 인간의 존재 조건의 하나로 기술되고
있다.  고전 15:53-54에서 바울은 새 시대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자들
의 존재의 특성을 기술하면서 죽지 않을(immortal)이라는 말과 썩지 않을(
incorruptible)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말들을 사용하여 변
화가 심리적인 데서 영적 생명으로, 다시 말해서 지상적인 데서부터 천상적
인 인간의 방향으로 일어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불사성은 제2 아
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 의하여 일어난 인간상태의 변화된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불사성은 사망과 죄의 권세가 아니라 성령의 권세가 지배적인 
원리를 작용하는 인간생활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불사성이란 신
적인 생명의 권능에 참여함으로써 변화된 인간의 생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
독교인의 부활의 소망 속에는 생명을 파괴하고 훼손시키는 권세에 대한 최후의 
승리에 대한 인간의 소망의 성취가 함축되어 있다.
     불사성에 대한 이같은 사상과 플라톤적인 전통적 사상과의 대비는 명백하
다.  그들은 둘 다 사망, 즉 인간 자아의 소멸을 신과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의 상실로 보았다.  한편 바울은 플라톤과는 달리 불사성을 본성(
nature)의 문제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는 불사성이 인간들이 그 자체 속에 스
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특정한 관계를 맺음
으로써 인간에게 부여되는 것으로 보았다.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아는 영혼이 아니라 이와 구별되는 육신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
것은 생기를 부여받은 육신으로서의 총체적인 인간의 인격이다.  끝으로 바울은
 불변적인 것과 가변적인 것, 다시 말해서 비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구
분하는 이원론을 거부한다.  그의 이원론은 현재와 미래, 즉 현세와 내세를 구
분하는 이원론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불사성은 새로운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인간 존재의 방식을 성령을 통해서 변형
시킨 것이다.
     4. 초대 교회 교부들:  이른바 사도교부들의 저서에서 쓰이고 있는 불사
성이라는 말은 바울적인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새 생명을
의미하는 말인데, 여기서 새 생명이란 미래에 완성될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현재적 실재로 간주된다.  불사의 생명은 기독교인들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은
사들 중의 하나이다(클레 일 35:1-4).  불사성은 예수 안에서 알려진 것이다(
디다케 10:2).  이그나티우스는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빵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
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불사의 약이라고 주장하
고 있다.  오직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한에서만 영혼의 자연적 불사성에 대
한 암시가 나타난다.  그리고 문맥상으로 보아 여기서의 불사는 기독교인들이 
고대하는 구원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사실상 영혼이 자생적인 것이며, 썩지도 않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영혼불
멸설은 영지주의파들을 제외하고는 2세기의 모든 기독교 제자들에 의해 배척되
고 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영혼은 본래 불사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아무것도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반박하고 있다.  그
는 영혼은 하나님처럼 자존하는, 즉 피조되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사성
을 지닐 수 없다고 말한다.  불사성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가 주시는 
은사이며 그때 믿는 자들은 "하나님처럼 불사의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창조되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을 부인하고, 불사성이란 종말
에 신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후기 헬레
니즘 시대의 인류학의 진부한 주장들을 거부하지 못하였다.  초기 교부들은 이
간은 영과 육의 복합체이며 사망이란 영과 육이 분리되는 것이며 이러한 분리 
이후에도 영혼은 살아 남는다고 가정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영혼의 생
존은 단순한 자연적 사실이지 영혼과 육신에게 다같이 약속되어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종말론적 불사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유스티누스의 제자인 타티아누스는 그의 [adress to the greeks]에서 영혼
은 그 자신 속에 불사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였다.  불사성은 
진리에 대한 지식과 로고스와의 친교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아담이 범죄
하여 사망하게 되었을 때까지 아담이 누렸던 것이다(참조. 롬 5:12).  하지만 
이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누스는 죽은 후에 영혼이 살아 남는다는데 대
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레네우스는 일반적으로 안디옥의 
데오필루스가 가르친 바대로 아담은 미완성적인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불사
의 가능성만을 가진 존재라는 주장에 동조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혼이 육신이 죽은 후에도 "여러 세대 동안" 살아 남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렇게 연명하는 존재는 참된 불사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불사성 안에 존속하는 것이며 불사성은 피조되지 않은 분의 영광
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레네우스는 이 당시의 다른 기독교인 저자들과 마찬
가지로 종말론적 불사성 속에는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도 포함된다고 보았다.
     이들 주장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원리는 불사성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인간의 경우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불사성
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사라는 점이다.  교부들의 주장은 후기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피조시에 불사성의 은사를 받았으나 죄를 지음으로
써 그것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범위에서만 영혼은 본래 불사의 존재라는 플라톤
주의자들의 주장과 접근한다.  일반적으로 아마도 오리게네스를 제외하고는 죽
은 후에 영혼이 살아 남는다는 것과 본래의 의미에서의 불사성가는 면밀하게 구
분된다.  본래의 의미에서의 불사성이란 종말론적 실재로 존속하며 여기에는 영
혼과 육체가 다 포함된다.  기독교 사상이 순수한 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이지 못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쿨만이 생각했던 바와 같이 바울의 또는 성서의 인류학 때
문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자존하시고 불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피조물 등은 하나
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를 의지해서만이 불사성을 지닐 수 있다는 교리 때문이
다.
     iv. 조직신학:  일반적으로 불사성이란 끝없는 삶을 의미한다.  그것은 죽
을 수밖에 없는 존재(신들, 하나님)와 죽음 후에도 변화된 형태로 존재하는 존
재에 관해서만 언급된다.  이러한 생존자는 인격적인 존재이거나 비인격적인 존
재(초인격적)로서 생가될 수 있으며, 무형적인 존재이거나 어떤 면에서는 유형
적인 존재로서 생각될 수 있으며, 보다 낮은 정도의 존재이거나 보다 높은 정도
의 존재로서 생각될 수 있다.
     1. 비교 종교:  죽음 후의 생명에 관한 믿음은 장례의식들 및 원시종교에
서의 사자숭배 이전에도 원시문화의 매장 절차들에 의해 입증된다.  매장시에 
묻는 유물들, 사자의 책들과 신화들에 비추어 볼 때 문제의 생명은 주로 이생
에서의 샘여이 약간 바뀌어진 형태로서 생각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도 차이점들은 여전히 계속된다고 생각되었다.  죽음 후의 계급은 사
자의 도덕성이나 그의 친척들의 도덕성, 장례의식이나 제사 형태, 그의 죽음의 
성격이나 단순히 그가 이생에서 가지고 있던 계급에 의해 결정될 수 있을 것이
다.  점차적인 정화의 개념과 관련된 보상과 형벌은 윤회설의 특수한 특징들이
다.  비록 그 궁극적인 목표는 서로 다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즉 니르바나(열
반)에 들어가는 것이나, 오르페우스교에서처럼 브라마(범천)에 들어가거나 영혼
이 모든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들어가는 것 등과 같이 말이다.
     2. 철학사:  오르페우스교의 전승은 플라톤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플라톤은
영혼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 순간에 육체를 떠나서도 여전히 소멸되지 않고 존
재하는 요소로서 정의함으로써 불멸성에 관한 서구사상의 근거를 확립해 주었
다.  그러나 영혼은 단순히 인간의 일부는 아니었다.  "인간은 그의 영혼 이외
의 어떤 다른 것도 아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의 불멸성은 일반적으로 자
연의 윤회성에 근거하고 있으며 회상 이론, 즉 영혼이 그의 이전 존재에 상응하
게 잔존한다는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보다 그럴 듯한 것은 플라톤이 분해될 
수 없는 영혼의 단순성으로부터 영혼의 불멸성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며 진리, 
선 그리고 아름다움의 영원한 형상들을 파악할 수 있는 영혼의 능력으로부터 그
것을 논의하는 것이다.  같음은 같음에 의해서만 알려지기 때문에 영혼은 
형상들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 없다.  마지막으로 그는 [phaedo]-이것도 
역시 [phaedros]에서 취해진 것임-에서 생명 원리로서의 영혼의 성격으로부터 
영혼의 불멸성을 논의하고 있다.  질료와 형상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은
몸과 영혼의 보다 밀접하고 보다 유기적인 통일을 보증해 주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영혼의 불멸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어렵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초인격적인 지성(nous)만이 불멸적이었다.  플라톤적 접근과 아리스토텔
레스적 접근은 후대의 철학파들에서 여러가지로 결합되었다.  플라톤은 여기서 
기독교 사상을 위한 위대한 대가였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의 불
멸성을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영혼의 능력으로부터 입증하고 있다.  신학적(그
리고 윤리학적) 논증들도 역시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채택이 엄격한 철학적 논의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
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제5차 라테란 공의회에 의한 아베로이스주의의 거부와 함
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이론은 플라톤적 해석이 부여되었다.  르네
상스 시대에는 영혼의 불멸성이 플라톤주의자들과 회의주의자들 사이의 주요논
쟁 주제들 중의 하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가운데서는 아베로이스주의
자들과 알렉산드리아인들 사이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나 특히 라이프니츠
와 함께 그것은 계몽의 중심적인 도그마로서 취급되었는데 적어도 독일에서는
그랬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계몽이 오히려 불멸성 개념에 대하여 회의적이고
적대적이었으니 프랑스에서는 볼테르의 [encyclopedie]가 대표적이었고 영국에
서는 흄이 대표적이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독일에서는 스베이덴보리의 영향
력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런데 칸트는 스베이덴보리의 꿈을 공격하였다.
칸트는 전통적 증명들의 합리적 가치를 이율배반적이라 하여 거부했으며 대신 
불멸성을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근거 위에서 수립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끊임
없는 진보에 의하여 그의 본성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며 세상의 도덕적 
질서는 인간의 운명이 그의 덕목들과 일치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피히테
에게 있어서 불멸성은 진리를 파악하는 순간 이미 거기에 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복된 삶으로 그 결과를 보다 완전한 사랑에로의
변형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헤르더나 괴테의 보다 감정적인 인본주의나 인
격주의 및 그후 쉘링의 신지학적 사고와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헤겔의 사상은 그
후 영향력을 끼쳤다.  아니 오히려 세계정신의 역사에 비추어 보아 헤겔 자신의
애매한 입장을 인격적 불멸성에 대한 부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널리 영향력을
끼쳤다.  이러한 좌파 헤겔주의와 주로 생물학적 양식을 띠는 조잡한 유물론은 
우파 헤겔주의자들과 사색적 유신론에 의해 반대되었다.  오늘날의 철학에 있어
서 죽음은 널리 유행하는 주제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불멸성의 증명에 관심
이 기울여지지 않는 것은 신의 존재 증명에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는 것과 마찬
가지이다.  불멸성이 거부되어 의문시되든 아니면 받아들여지든 간에 말이다.
     3. 신학:  성서신학적 인류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단어는 불멸성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에 보면 스올에도 생존자가 있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것은 인간의 한 부분으로서의 영혼이 아니며 인간의 실재적 존재로
서의 영혼은 더구나 아니다.  오직 인간의 그림자만이 생존하고 있다.  그리
고 이것이 불멸성이라고 일컬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생
존자는 이생에서의 생명의 상실과 비교해 볼 때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진 존재에 대한 점증적인 소망과 비교해 볼 때도 그렇다.  헬레니즘
의 영향력은 이미 포로기 후기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도 언
급되었듯이 교부신학은 플라톤적 개념을 취하여 그것을 구약성경의 후기 책들과
신약성경에서 표현된 부활 신앙과 결합시켰다.  그러나 몸과 영혼의 관계성을 
형상과 질료의 관계성에 의해 기술한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이 도그마
가 되지는 않는 것처럼 아베로이스주의에 반대하고 종말론에 근거하여 공식적 
선언을 한다고 해서 불멸성에 관한 철학적 설명이 신앙의 일부로서의 지위를 차
지하게 된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거짓된 해석들을 거부하기는 했
지만 신앙의 자기표현을 위한 간편한 방식으로서 기존의 철학적 용어는 그대로 
사용하였다.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그러한 모든 목적을 크게 거부하였다.  엥
겔라트는 [evangelisches kirchenlexikon]에서 불멸성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세
개의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다.  즉 a. "홀로 불멸성을 가지는 하나님의 신성을 
위해서"(딤전 6:16 참조. 고전 15:53),  b. 그 기원이 육체에 있지 않고 영혼
에 있는 죄 때문에, c. "인간의 통일성 때문에."  그러나 비교적 온건한 입장
을 취하는 흔적들도 있다.  사실 불멸성 신앙이 육체와 영혼 사이의 이분법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영적 존재의 불후성을 기준으로 하
는 고전적인 논증과 영원한 상벌을 기준으로 하는 고전적인 논증은 자유 자체에
관한 내적인 기본 경험을 표현하는 어떤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 보여질 것이
다.  자유는 진리와 선의 무조건적인 요청을 체험할 때 경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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