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준21>2017세미나 강사인터뷰-화종부목사님(남서울교회)

추천 : 45  |  비추천 : 4  작성자: 관리자  |  2017-06-03 15:24

<강단개혁, 한국교회 회복의 시작이다.>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라."

"복음과 성경에 충실하라."


 (남서울교회 화종부 목사님)


1. 한국교회 위기의 원인들에 대해 질문을 드리면 막연한 부분도 있지만,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위기의 원인들에 대해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우선 위기라는 말에 대한 정의가 많이 과장되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요. 물론 틀림없이 위기로 봐야 될 영역이 있고 그것에 동의하지만 교인수가 준다든지, 주일학교 수가 준다든지 하는 개념으로 위기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부적절한 접근이라고 봅니다.

 

정확한 자료와 데이터에 근거한 분석이 아닌 막연한 분석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일반학교가 얼마 정도 줄어드는데 주일학교가 얼마 정도 줄고 있는지 이런 비교도 없이 말이죠. 일반학교들도 학생 수가 급격하게 줄고 있는 부분을 짚어봐야 되요. 절대수치로만 가지고 위기라고 말하면 통계적으로 좀 부정확하고 감상적인 위기론을 부추기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용어를 쓸 때 좀 더 정직하게 쓰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로 제가 보는 한국교회의 위기는 사실 지금의 문제라고 보지 않아요. 이미 30년 전부터 심어진 것이죠.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의 위기는 내용과 본질의 결핍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온 겁니다. 지금이 위기라기보다 30년 동안 위기를 뿌렸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본질이란 복음이겠고 내용은 성경인데, 한국교회에서 하고 있는 설교나 교회에서의 가르침이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성경에 충실한가, 얼마만큼 복음적인가하는 것을 정직하게 평가할 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목사님이 교회사를 전공하셨기 때문에 질문을 드려 봅니다. 사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과  현상이 대공황때부터라고 하더라고요. 지금 몰려온 게 아니라 거의 100년 가까이 전에 시작한 건데, 현상학적으로 동성애라든지 그 영향들이 미비했던 것들이 확산되어 몰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한 영적 대처 능력이 목회자들이 너무 부족하지 않았을까요? 세상을 소화할 수 있는 이해력이나 시대사상들과 영향들에 대해서 인지할 수 있는 실력이 부족하니까, 그런 면에서 말씀해 주신다면요.

 

저는 그런 실력이 사회적인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라 보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과 복음을 충실하게 연구하고 가르치면 충분히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런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 예측하고 있고 그것에 대한 성경적인 대안이 이미 나와 있어요. 그런데 성경과 복음을 충실히 연구하려는 노력이 너무 없이 자꾸 성경적이라는 모호한 방식의 어떤 총체적 복음이라고 희석시킨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참 답답해요.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당면한 사회과학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석은 우리보다 정치학자들이 훨씬 더 잘하잖아요. 동일한 사회현상에 대한 해석을 우리는 성경에 충실하게 해내야만 우리들 자신만의 역할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너무나 어설프게 사회과학적인 접근을 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이 무어라고 말하는지 선명하게 말을 해야 세상이 우리에게 귀를 기울일 텐데, 어설프게 사회과학적인 접근을 하니까 교회가 서서히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이죠.

 

교회가 사회과학적인  부분들을 융통성 있게수용하면서 사회로 나가는 문턱을 넓히는 게 더욱 좋다는 의견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어떻게 말씀해 주실까요?

 

우리처럼 신학과 본문에 충실하려고 하는 신학을 한 사람들까지 그것을 해야 될까요. 오히려 저는 우리 색깔을 더 분명하게 하면서 동역을 해야 진짜 유익한 역할을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적 관점보다 어설픈 사회과학적 관점을 추구하는 현저히 다른 교단을 따라가는 게 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사람이에요. 그런 관점에서 오히려 우리의 입장에 충실한 것이 정말 참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사회과학적인 렌즈로 보지 않고 성경적인 렌즈와 복음적인 렌즈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고찰하면 사회과학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볼 수 있어요. 사회과학단체들이나 NGO 단체들과 같이 어중간한 데 있으면 안돼요. 교회만이 낼 수 있는 아주 분명한 보이스가 사라지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 실제로 한국사회에 NGO단체는 70%가 다 기독교단체예요. 지금 그게 모자라서 보이스가 안 나오는 게 아니지요.

 

그럼 다변화된 사회에서 비진리에 있는 사람과 어떻게 소통을 해야 될까요? 다양한 방법을 통해 두드려야 될 부분이 있을 텐데요.

 

그건 성도들이 하는 거죠. 성도들이 삶의 현장을 다 가지고 있는데 교회가 강단에서 어쭙잖게 다루면 제가 볼 때 더 어렵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학교가도 듣고 방송에서도 듣고 회사가도 들어요. 정말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는 교회 아니면 못 듣는 것이죠.

 

왜 우리 교회는 세상을 향해 뭘 열고 만들고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가장 교회적이고 성경적이면 세상을 가장 잘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교회가 세상과 자꾸 대결구도로 가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초대교회나 모든 교회가 강성했을 때는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예요. 세상과 친할 때가 아니에요. 메시지에 충실하다 보면 교회는 반드시 핍박을 당하게 되고, 그 핍박이 오히려 교회를 강성하게 만들어 왔어요. 지금 교회는 사회와 비슷하게 됨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데 오히려 그게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거죠. 역사 자체가 그렇게 말하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남서울교회 성전)

 

2. 2011년 남서울교회에 부임하시고 남서울교회가 새롭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지속적으로 강단개혁을 주장하셨는데, 교회의 변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사람마다 접근하는 게 다르지만 저는 소그룹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큰 그룹의 변화가 우선이다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랜 세월을 예배에 에너지를 다 쏟았습니다. 그리고 예배 변화의 핵심은 설교의 변화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편의 설교에 일주일을 모조리 쏟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충실히 말해보려고 애를 썼고, 그것이 저로 하여금 강해설교에 에너지를 다 쏟게 만든 동력이었어요.

 

사실 남서울교회에 와서 제가 한 일은 거의 없어요. 저는 오로지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에 근거한 충실한 설교를 하려고 애썼어요. 그리고 잘 준비된 회중들이 제가 기대한 이상으로 잘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그것이 대안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방식이 본이나 모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지 않아요.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방식은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희생과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나온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님처럼 복음을 살아내는, 그저 덕을 끼치거나 모델링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십자가를 지고 죽는 희생하는 성도들의 삶을 살아야한다고 가르칩니다. 흔히 남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본을 보이는 게 아니라 복음에 근거해 잘 희생해서 죽고 남을 살려야 그게 성도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가르쳐요.

 

목사님의 강단개혁의 정신을 목회자들이 따라가려면 신학적 부분, 목회학적인 부분, 리더십이 다 포함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팁을 좀 주신다면요.

 

우리는 이미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접목된 것은 안 가르쳐도 습득이 됩니다. 그러나 특별계시인 성경은 우리가 부지런히 익히고 연구하지 않으면 습득이 되는 게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세상 메시지는 어디에서든 듣지만 하나님이 이 시대에 원하는 메시지를 듣는 것은 본문을 읽어야만 가능한 거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목회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사역입니다.

 

성도들이 부지런히 본문을 열어서 읽지만 목회자가 꾸준히 성경을 근거로 방향을 열어줘야만 하죠.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습득이 될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세상은 계속 다중적으로 메시지를 쏟아내는데, 목회자들은 설교에 있어서 연구나 깊이있는 묵상이나 이런 것이 없이 작은 지식을 실천적인 어떤 것으로 연결하려고 하니까 어렵죠.

 

저는 본문에 많이 머물러 있어요. 20년 동안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할 때 20시간 정도 걸렸어요. 그런 과정이 없이 너무나 짧은 명제를 붙들고 세상과 연결을 시키려고 하면 안 되죠. 진리를 캐내는 과정에서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해요. 그런데 정작 여기에는 에너지를 못 쓰고 있다는 거예요.

 

본문과 복음이라는 기독교의 사활을 거는 굉장히 중요한 이 주제는 깊이 있게 다양한 렌즈를 가지고 봐야 해요. 사회에 영향을 미치면서 기여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쏟으니까, 상대적으로 이쪽보다 다른 쪽으로 논리가 흘러간다는 거예요.

 

제가 볼 때 기독교윤리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안 드러난다는 것이죠. 일반윤리 정도 수준밖에 안되는 거예요. 그것이 당장에 빠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착하는 것은 아니죠. 본문 앞에 많이 머물러 있는 장점은 설교에서도 나와요. 삶의 적용에 치중하는 것 이상에 본문에서부터 파내고 끄집어낸 현장성이 있는 적용을 각 개인의 취향에 따라 확대할 수 있죠. 저 같은 경우는 역사와 정치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훨씬 더 사회참여적이고 사회개혁적인 적용을 많이 할 수 있는 거죠.

 

답은 나오는 데 거기까지 못 미치지 않습니까?

 

본문 자체를 실제 파내지 못해서 그렇다고 봅니다. 저는 기독교가 가르치는 윤리의 정점이 본이나 덕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희생과 죽음이라고 봅니다. 십자가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에요. 십자가는 구원의 도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에게 십자가는 삶의 도리입니다. 그것을 한국교회가 묶어내지 못하는 것이죠. 구원의 도리로는 전하지만 삶의 도리인 줄은 너무나 많이 몰라요. 그러니까 이런 것이 본문에서부터 안 파지는 거죠. 본문이 깊어지면 굉장히 급진적이고 과격한 기독교적인 윤리가 나오거든요. 세상이 말하는 수준이 아니에요. 세상을 바꾸고, 세상이 정말 듣고 싶어하는 윤리가 기독교 안에 있는 거예요.

 

종교개혁 때 나온 것과 같은 것인데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나온 게 평양대부흥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 외에는 한국교회에서 다른 운동같은 게 나온 것이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사실은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가 너무 짧죠. 제가 보는 모든 시대는 교회가 30년의 부흥과 70년의 침체를 반복합니다. 영국교회는 300년 동안 업앤다운(Up&Down)을 반복해요. 그렇게 말하자면 기간적으로 부흥이 길었던 게 아니고 침체가 길었어요. 그러나 교회는 기적같이 살아나고 기적같이 삽니다. 저는 그런 것을 기대합니다.

 

유럽교회가 지금도 그렇습니까?

 

유럽교회를 종교개혁에서부터 카운트해서 영국교회만 놓고 봅시다. 청교도들이 나왔지 않습니까? 영국이 확 살아납니다. 그러다 다운되고, 다시 18세기에 대부흥이 일어납니다. 찰스 스펄전을 거치면서 다운됐던 교회들이 부흥이 일어나죠. 그러다가 다시 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교회가 다운됩니다. 그리고 1900년 초에 또한번 부흥이 옵니다. 그래서 교회가 다시 살아나고 다시 1900년 중반에 다운됩니다. 다시 한번 부흥이 오고, 그런 방식으로 업과 다운이 반복됩니다.

 

그럼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유럽교회들이 다시 일어나기는 힘들 거라고 보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교회에 업앤다운이 있다고 해서 그 교회를 계속 쓰는 게 아니에요. 쓰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넘어갑니다. 그런 것처럼 유럽교회는 이제 넘어갔다는 거예요. 제가 볼 때 유럽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죠. 유럽을 거쳐 이미 미국으로 갔잖아요.

 

미국교회도 이제 끝물이라고 봐요. 17세기 18세기에 큰 부흥을 경험하다가 19세기 초까지도 무디까지 부흥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늘 좋기만 했던 게 아닙니다. 미국교회도 업앤다운을 계속 반복하거든요. 개인적으로 미국은 더 못 일어날 거라고 봅니다. 팀 켈러나 존 파이퍼 같은 좋은 사역자들이 많이 나오지만 이제는 돌이키긴 힘들지 않을까 봐요.

 

한국과 중국과 인도 쪽으로 넘어오는 거라고 봅니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한 번 정점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계속 다운됩니다. 1970년대부터 30년 우리는 호황을 누렸지만 저는 본문과 내용에서 부흥이 있었는가 보면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수는 많이 모였지만, 그런 면에서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한국에 미국의 실용주의 신학이 들어왔잖아요. 미국의 실용주의 신학이 들어오기 전에 중국은 먼저 기독교가 들어왔기 때문에 중국의 신학과 한국의 신학이 좀 다르지 않을까요?

 

중국의 신학은 잘 모르기 때문에 중국의 신학이 더 성경적이라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하나는 분명해요. 중국교회는 고난을 거쳤습니다. 문화대혁명 같은 고난 안에서도 살아남았어요. 세계가 놀란 것은, 중국의 교회가 다 박멸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상대적으로 건강한 교회들이 살아남은 것 아닙니까.

 

한국은 제대로 된 고난이 없었습니다. 6.25와 같은 것도 고난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고난과 함께 징계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를 건강하게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죠. 한국교회는 그런 면에서 1907년에 큰 부흥이 왔지만 제가 볼 때 내용적이고 본질적으로 충실할 수 있는 기회를 못 가졌어요.

 

사실은 이런 식으로 교회가 자란 것은 처음이에요. 교회는 역사상 고난과 피를 뿌리면서 자랐습니다. 우리는 사실 피를 안 뿌렸어요. 조심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6.25를 피 뿌린 것으로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저는 징계적인 성격도 같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이 위기라고만 말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제 정말 불필요하고 기독교적이지 않은 거품을 걷어내야 해요. 교회 안에 기복적이고 세속적인 거품들이 너무 많아요,

 

제대로 된 고난이 없었던 한국교회가 이제 총체적인 회복이 필요한 상황에서 중국교회로 촛대가 이미 넘어간 것은 아닙니까?

 

그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총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는 100% 동의해요. 그러나 복음이 가지고 있는 굉장히 중요한 영광스러움 중의 하나가 은혜성이잖아요. 저는 지금 한국교회가 자꾸 실수하는 것이 복음의 중추인 은혜를 은혜답게 여기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한국 성도들이 율법주의적이에요.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 분절적인 신앙을 갖고 있어요. 아주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저는 성경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그것들을 그런 식으로 붙여낼 수 없어요. 은혜의 통치라는 새로운 질서가 있잖아요.

 

한국교회 문제가 너무나 총체적이고 해결해낼 수 있을까 하는 영역에서 부정적인 부분은 많지만, 제가 보고 있는 하나의 굉장히 중요한 상징성이 은혜의 주권성이에요.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수가 많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충성스러워서도 아니고 신명기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 제일 작고 제일 모자라지만 유대인들을 택한 거잖아요.

 

한국도 그렇다고 봐요. 우리 안에는 있는 가능성, 충성스러움 이런 것이 있어서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이다이렇게 절대로 믿지 않고 있죠. 지금 한국교회가 이렇기 때문에 중국에 바통이 넘어갔다는 것도 똑같은 관점이라고 봐요. 율법주의적인 전제 위에서 보는 것이죠.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복음이라는 은혜 위에서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 하나밖에 없는 길이라는 거예요.

 

또 섣부른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지금 선교마무리 시대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목사님은 한국교회 역할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교회는 북한사람들과 중국과 인도를 데리고 남아있는 대륙을 섬기는 거죠. 세계 선교 일을 제일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제가 볼 때 중국 사람이에요. 중국 사람들은 남아있는 지역을 자유롭게 다 들어갈 수 있어요. 그렇지만 현재 중국은 독자적으로 선교할 수 있는 수준은 안돼요. 앞으로 15년 정도는 한국교회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겁니다.

 

한국 5천년 역사에 우리가 중국의 영향을 받기만 했잖아요. 중국을 섬길 기회가 되는 거죠. 이것이 은혜의 역설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의 논리, 인간의 분석, 인간의 판단대로 안 되고, 그렇게 함직한 어떤 사람들을 쓰시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함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준비시키시죠.

 

누가 봐도 중국이 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중국이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요. 미국이 했다, 유럽이 했다, 당연하죠. 한국이 했다, 그러면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요. 저는 거기에 소망을 걸고 있어요. 우리 조국교회를 볼 때 아무 소망이 없지만 역사가 흘러가는 것을 보면 한국을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거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기를 원한다. 그래서 중국이 하면 사람들이 시큰둥하게 듣지만 한국이 했다그러면 다른 시각으로 보죠.

 

사람들은 자꾸 추론 가능한 것을 끄집어내고 싶어 해요. 구주가 세상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제일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은혜의 역설이잖아요. 자기들의 생각의 틀을 깬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는 그걸 못하고 있는 거잖아요. 한국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자본주의를 지지해줬어요. 자본주의를 깬 게 아니었죠.

 

제가 담임이 되고 얘기한 게 잘 되고, 높은 지위를 얻고, 영향력을 갖는 게 전부가 아니다. 복음은 죽는 것에 힘이 있는 것이다.”였어요. 아무리 가르쳐도 아무도 귀담아 안 들었어요. 제가 남서울교회에 와서 가장 감격적이었던 것은 그 메시지를 알아들었던 사람들이 나왔다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갖는 윤리의 핵심이 업사이드 다운’(Upside Down)이에요. 세상이 높여놓은 것을 하나님 나라에선 낮추고, 세상이 낮춰놓은 것을 하나님 나라는 높여놓거든요. 이 업사이드다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은혜의 역설을 교회가 못 살려내는 거죠. 그러니까 늘 예수 잘 믿고 공부 잘하고 사회에 지도자들을 잘 길러서 조국의 미래를 준비한다이렇게 생각했다는 거예요.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갈릴리 어부들을 데리고 교회 2천년 역사를 바라보며 제자훈련을 하셨어요. 그러나 한국교회는 예수 잘 믿고 복 받아서 인생 잘되는 사람들을 길렀다는 거예요. 그게 아니죠. 그 사람들이 어떤 부류든지, 세상을 살려고 하지 않고 주님 때문에 죽을 줄 아는 사람을 길러내면 그가 부자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박사든 못 배운 사람이든, 아무 관계가 없어요.

 

중세교회가 사람들이 중생이라는 과정을 안 거치고 들어와서 죽은 거잖아요. 교회는 중생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들어오는 공동체인데, 그거 없이 교회가 나를 요구하지 않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교회를 그냥 들어오면 어떻겠어요. 교회를 다 비틀어놓잖아요. 왜곡시키는 거거든요.

 

목사님의 그런 인식을 후학양성 등으로 확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왜 그러지 않으셨을까요?

 

예를 들어 제가 그것이 운동 방식으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수십 년 전에 벌써 했겠죠. 저는 하나님이 바람을 한 번 주셔야 된다는 생각이거든요. 저는 제자들교회 시절에 한 달에 3번 외부집회를 다녔어요. 제 역할이 그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본교회를 한 달에 1주만 섬기고 십 몇 년 동안 정말 수도 없이 많이 집회를 하거나 전국을 다 다녔습니다.

 

저는 종교개혁의 본질을 운동성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거든요. 예비된 심령 속에 하나님의 부름을 던진 거예요. 그런 방식이 아니고 인간적으로 어떤 방송을 탄다든지, 어떤 매스컴을 통해서 가능했다면 벌써 제가 했겠죠.

 

보이지 않는 제자들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봅시다. 예수님도 제자 열둘밖에 없었는데 세상을 뒤집어놔요. 그것을 기대하고 있어요. 제가 볼 때는 사실 한국교회가 이 조정기간을 지나가면서 배워야 하는 중요한 것이 주님을 기다리면서 납작 엎드려 있어야 하는데 자꾸 말을 한다는 거예요. 완급조절도 필요해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바람이 불어야 감동이 되는 것이죠.

 

한국교회가 이제는 입을 딱 다물고 하나님의 처분에 맡겨드리고 주님께로부터 바람이 이렇게 불어오는 것을 기다려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나같은 사람까지 나서서 운동같은 일을 하면 나라 망하는 거죠. 교회 망하는 거예요.

 

저는 여기 남서울교회에 이력서내고 선보는 설교하고 오지 않았습니다. 저를 담임목회자로 와달라고 청빙해서 오게 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여기 제가 올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나보고 선택하라면 절대로 안 왔을 거예요. 그렇지만 여기 와야 했던 이유가 와서 보니까 보여요. 일을 하라고 보내셨구나.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려고 해요. 평생 연구했던 본문에 충실하는 것, 한국교회가 하는 것처럼 자꾸 바람을 만들어서 세상처럼 일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바람을 쥐고 주님의 방식으로 일하는, 제가 믿고 있는 진리와 신학에 충실한 일을 하려고 그래요. 그런 사람도 있어야 될 거니까요.


  

3. 한국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국제선교회 이사장으로 섬기시는데, 한국교회 선교에서 방향성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WEC국제선교회는 C.T. 스터드라는 사람이 영국에서 시작한 100년이 넘은 선교단체입니다. 한국에 세워진 건 올해 만 20주년이 되었습니다. 이 단체가 영국에서 100년 이상 된 선교단체이기 때문에 굉장히 탄탄한 편이죠. 한국에 들어온 지 20년 밖에 안됐는데, 500명 조금 안 되는 많은 선교사들을 지금 파송하고 있어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죠. 미전도종족 전도를 하고 믿음선교를 합니다.

 

믿음선교라는 게 무엇입니까?

 

제가 이사장인데 본부에서 한 번도 저에게 돈을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필요를 알고 채워주신다고 믿고 재정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선교단체입니다. 보통은 선교사님들이 펀드레이징(Fund-raising) 하길 원하지만, 이 단체는 선교사님들이 사역보고와 부름에 대한 나눔을 하면 후원자들이 후원해주기를 기다리고 굉장히 소극적이죠. 요즘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 정서가 저하고 잘 맞아서 제가 14-5년 전부터 이사를 했고, 현재 이사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게 있습니다. 이 선교단체 이사로 영입이 됐을 때 갔더니 대표가 목사선교사님이었고, 이사장이 장로님이셨어요. 그런 균형이 딱 세워져 있었고, 부부가 같이 이사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균형이 잘 맞고 남자와 여자의 균형이 잘 맞아있는 단체예요. 이사회를 다녀올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요. 어떤 선교단체 이사회에 가보면 너무 답답해요.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문제만 나와요. 그런데 여기 이사회는 문제가 나오면 바로바로 해결이 나오죠. 많은 자원하는 좋은 평신도들이 들어와 있어서 그런 일들을 바로 해소를 해줍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님이 병에 걸려 들어오면 이사들 중에 다수가 의사니까 바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죠. 열려 있고 건강하고 헌신된 분들이 계세요.

 

세계선교는 한국교회에 열려있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봐요. 한국교회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아닙니다. 제 그림은 중국교회를 잘 준비시켜서 한국사람 1명 중국사람 10명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가면 세계선교가 금방 될 것이라 생각해요. 틈나는 대로 해외 선교, 세계 선교에 대한 것을 많이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세계선교를 꼭 잘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4. 청년사역을 오랫동안 하셨기 때문에 질문을 드려봅니다. 비정규직 문제, 청년실업, 결혼포기세대 등 이게 사회적인 문제이면서 한국교회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세상이 가진 모든 것을 다 가져서 영향력을 미치고 감화를 끼쳐서 이끌어가는 것을 이상적인 리더십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살수록 남들에게 다 있는데 저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보게 돼요.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못하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처음엔 힘들어요. 그러나 그것들이 받아들여지고 나아가 조금씩 눈이 열려지니까 약한 것이 강한 것이구나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모든 것을 가졌다 하는 말이 그냥 형식적인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 생생하게 와 닿아요.

 

저의 20대와 30대를 돌아보면 너무 암울하고 두려웠습니다. 아무것도 보장된 것 없고 담보된 것 없었어요. 유학을 떠나는 순간엔 내가 정말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을까자신도 없고 두려웠어요.

 

사실은 조금 더 문제를 정직하게 봐야 된다고 봐요. 이게 우리 시대 문제에만 국한돼 있는 것인가. 청년실업을 예로 들면, 단순히 일터가 없는 것이 문제인가. 청년들의 암울함이라는 것이 일터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우리 때에는 좀 나았을까요? 저는 다르게 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틀을 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흔넘은 미혼 자매들은 얼마나 좋습니까. 자유롭게 교회를 마음껏 섬길 수도 있죠. 제가 나름대로 한국교회에서 원칙을 지키고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자녀가 있었으면 가능했을까 싶어요. 자식한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했다면 저도 원칙을 못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쨌거나 저만 안하면 되니까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원칙과 원리들을 철저하게 붙들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생각을 좀 바꾸어 봅시다. 저는 기본적으로 모두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 말이 어떤 면에선 반드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결혼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실패를 하는 분이 아니신데 늦게까지 결혼이 안 되면 주님의 부름을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더 전투적으로 문제를 풀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이 옛날부터 쓰던 똑같은 방법이 성도를 협박해서 세상의 종이 되게 하는 거예요. 너 세상에서 혼자 믿음으로 살면 너 혼자 완전히 도태되고 세상에서 끝난다. 이것이 옛날부터 세상이 쓰던 방법인데 지금도 똑같다는 거죠.

 

세상이 청년들을 향해서 협박하면서 진리와 성경과 복음과 세계선교를 못 보게 하고 계속 세상의 종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교회까지 부추기면 안 됩니다. 청년들의 결혼 문제를 한번 보면, 늦게 결혼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일정한 정도로 계속 결혼을 하고 있어요.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혀 문제를 계속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것들은 교회가 좀 거칠게 걸러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성경에 충실할 때만 분명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를 쫓아가느라 끝이 없습니다. 줄기를 잡아야 되는데 가지를 잡고 있다는 거예요. 교회가 현상만 다루지 근원을 다루지 못하는 거죠. 현상은 사회학자가 할 수 있고 NGO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현상의 근원이 되는 죄와 인간의 본성 문제는 교회만이 다룰 수 있어요. 그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나이를 먹으면서 행복한 게 있어요. ‘내가 이렇게 많이 새는구나. 내가 이렇게 불완전하구나. 내가 누군가와 같이 가지 않으면 같이 갈 수 없구나.’ 이런 게 정말 안팎으로 인정이 돼요. 그러니까 장로님들과도 동역이 되고 누군가와 함께 일할 마음이 생겨요. 진리와 관계가 되서 생명이 부끄러워지는 게 아니면 언제든지 종이 될 준비를 할 수 있죠. 성경에 충실하지만 고집스럽지 않고 더 포용력이 있을 수 있고, 사랑하고 희생할 수 있어요. 성경에 충실하면 분별력이 생겨서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5.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영적 각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미준21> 세미나에서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강의하실지 간략하게 소개해 주십시오.

 

제가 늘 하는 것은 복음설교, 강해설교, 그 결과로서 십자가를 살아내는 것이에요.

 

저는 군부가 독재하던 시대에 성도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불의한 사회에 어떻게 성도답게 살 것인가가 청년 시절 고민의 핵심이었어요. 그래서 전도사가 됐을 때 내가 고민했던 문제였으니까 아이들에게 이것을 쏟아 부으면 아이들이 뒤집어질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너무 놀랍게도 목사님,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돼요? 내가 목사님 말에 동의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왜 그렇게 살아요? 나 못 삽니다.” 그랬죠. 제가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이 불의한 세상에서 성도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내는 청년들이 나와 주기를 기대하고 그런 메시지를 쏟아냈는데, 희한하게 아무도 그렇게 살고 싶어 하지 않고 좌절하는 거예요. 저에게 10개월 정도 굉장히 많은 고민이 있었어요. 도대체 내가 뭐가 문제일까, 내 메시지에 뭐가 좀 빠져 있는가. 계속 고민하는데, 고린도전서 2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어요. 저는 삶에 대한 이야기-불의한 세상을 어떻게 성결하게 살 것인가를 계속 말했던 거죠. 그리고 아이들은 그렇게 살고 싶어 하지 않고 좌절했어요.

 

10개월 동안 했던 설교 안에 십자가와 복음은 없었어요. 그게 저한테 너무 충격이었죠. 그리고 복음을 설교하려니까 사영리 수준밖에 안 들어와 있는 거예요. 너무너무 답답했어요, 본문 어디로부터 열어서 복음과 예수님을 어떻게 설교해야 되나,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제 영적인 순례가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멘토없이 스스로 어떤 방식으로 하신거죠?

 

, 그래서 복음에 관한 책들을 다 끌어 모아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존 스토트)가 도움이 됐고 로이드 존스의 책이 비로소 소개되기 시작할 땐데 그분의 책들을 닥치는 대로 다 읽었어요. 그렇지만 여전히 파편적이고 편린적일 뿐이지 구체적이고 전체적인 균형있는 상태대로 안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유학을 갔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 구원론과 관계하여 뭐가 핫 이슈였는가 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서베이(survey)를 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했던 몸부림이 로마서를 2년씩 48년에 걸쳐서 개인적으로 묵상하고 3번에 걸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자 복음이 약간 전체적인 균형을 갖고 들어왔어요. 그러다가 비로소 어느날 복음이 조금씩 깨달아지고 쉬워졌어요. 교회가 심장을 떼놓고 싸우고 있어요.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해야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하는 아이들에게 살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동력이 생기는데 이게 빠져 있는 거예요. 설교단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거예요.

 

한국강단에서 예수님을 강단에서 설교하는 게 몇 번이나 되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돌아보면 고난주간에 겨우 예수님 고난이야기 하는 것이에요. 요한복음에 내 피를 마시고 내 살을 먹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했는데 먹고 마신다는 것은 일상적인 행위예요. 일상처럼 먹고 마셔야 되는데 예수님의 피와 살을 그렇게 안한다는 거예요.

 

담임목사가 되어서 가장 좌절됐던 것은 부활절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거예요. 제 자신이 담임목사로서 부활을 정말 감격스럽게 설교하지 못하는 거였어요. 그때가 36살이었습니다. 그런 몸부림들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녹아났고, 하나의 목적을 갖고 목회를 했습니다. 제가 전도사 때 문제에 부딪치고 나서 저는 다른 건 몰라도 목회를 잘하는 분들은 많이 계시니까 예수님을 능수능란하게 설교하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하나의 목표만 갖고 지금까지 달려왔어요.

 

그렇게 복음에 붙들려서 달려오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구원의 도리라고만 믿었던 이 귀한 복음이 예수를 만나고 생명을 얻은 사람에게는 삶의 도리였다는 것을 깨달았죠. 결국 주님이 죽어서 은혜가 우리에게 흘러왔던 거잖아요. 죄 없는 그분이 죽고 하나님의 아들이 가난해져서 우리가 부해지고 우리가 생명을 얻은 것, 복음이라는 게 보이니까 삶을 더욱 과격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주님처럼 잘 죽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삶으로 살아내야지만 나올 수 있는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 말씀대로 살아와야지 얻을 수 있는 답이지, 이론과 강의로 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서 하나님이 바람을 불려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죠.

 

저는 남서울교회에 담임목사로 왔을 때 깜짝 놀란 것은 이런 이야기를 알아듣는 회중들이 있다는 거예요. 어디를 가서도 이런 설교를 했거든요. 제가 신대원 개강수련회 때 가서도 우리도 고난 받고 죽는 게 예수 믿는 성도들의 영광이다.” 그런 설교를 했어요. 그러면 신학생들 소수가 좋아했죠. 한국교회 어디를 다녀도 그런 설교를 하면 예수님을 통해 복 받기를 원하지 고난을 아무도 원치 않았어요. 여기 왔을 때 성도들이 그것을 알아들었다는 거예요. 그 울림이라는 게 제가 너무 위로받았어요. 우리 홍정길 목사님, 이 철 목사님이 마음밭을 잘 갈아주신 거죠. 정말 감사한 일이죠.

 

저는 사실은 제 마음에 내가 강남에 있는 교회에 왜 와야 되나.’ 그랬어요. 큰 교회 이런 데는 안 오고 싶었어요. 한 번도 유명한 큰교회 목회자들을 부러워해본 적이 없어요. 이전교회가 작은 교회였지만 강단에서 하늘이 열리는 기쁨들을 자주 느꼈거든요. 그러니까 설교집을 한 번도 내지 못했고 알아주는 사람도 소수의 신학생 일부들이 알아줬을 뿐이지 아무도 몰랐지만 한 번도 섭섭하지 않았어요. 하늘이 열렸는데 뭐가 아쉬워요. 다른 게 뭐가 의미가 있겠어요. 여기 오라고 해도 제가 올 이유가 하나도 없었죠.

 

그런데 남서울교회에 와서 회중들이 깊은 울림을 만들어줬을 때 굉장히 감격했어요. , 하나님! 이제 조국교회에 이런 회중들이 나오는 군요. 조국교회 한 귀퉁이에 이런 사람들이 나온다는 거예요. 우리교회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예상 가능한 것처럼 중산층이고 기본 이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에요. 재정적으로나 학벌에서나 능력에서나 다 기본 이상들이에요. 그렇지만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거죠. 체험적으로 아는 거예요.

 

우리는 30년 동안 예수 믿어서 잘되는 것만 얘기했잖아요. 높은 자리, 정치가, 변호사, 교수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생각했어요. 그게 진짜 세상을 바꾸는 방식이었다면 주님은 제자를 잘못 택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죠. 어떤 사람이든지 부름받은 자리에서 죽으면 많은 열매가 맺히는 거잖아요. 전부다 살려고 하는 세상에 죽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십자가는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주님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어요. 자꾸 십자가를 애먹이는 아들, 누구라고 생각해요. 그게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거든요. 자기가 죽어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 <한미준21>세미나를 통해 더 깊은 말씀 나눠주시기를 부탁드리며,  인터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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