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소통으로 현대목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베이직교회 조정민 목사님 편

추천 : 47  |  비추천 : 6  작성자: 관리자  |  2016-05-26 20:17

사람이 교회다말씀이 삶으로 녹아 스며들 때, 복음은 종교라는 장벽을 넘어 생명을 잉태하는 교회공동체를 이룬다. 복음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의 어떤 장벽도소통할 수 있다는 목회철학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목회자가 있다.

 

sns 팔로워가 20만명이나 되며 세상의 언어수많은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하는 교회 프론티어 베이직교회 조정민 목사님을 만나 교회의 본질에 대해 답을 구해본다.

 

(베이직교회 조정민 목사님)

 

* 베이직교회가 독립교단에 속해있기 때문에 교단에 대한 부담 같은 것은 적으리라 짐작됩니다. 목사님께서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을 충분히 진단하시고 원인과 대안을 도출하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오늘 인터뷰에서는 목사님의 목회 패러다임의 한 요소인 사람이 교회다라는 논지에 중심을 두고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성경적 교회란 무엇인지, 또한 목사의 목회란 무엇인지, 목사가 성도를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성경은 너무나 뚜렷하게 제시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하실 때 에클레시아란 말을 쓰셨는데, 그것이 불러낸 사람들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당시 왜 예수님께서는 불러냈다라고 표현하셨겠어요. 어디서 불러내셨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하나님 백성들이고 모두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말이죠.

 

저는 일종의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적 시스템으로부터 불러냈다고 믿습니다. 유대교가 신앙의 뿌리로 삼고 있는 종교적 시스템인 성전 중심, 이른바 제사, 성직자 중심 등 모든 종교 시스템으로부터 불러내신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그 불러낸 사람들을 교회라고 명명하시고, 공동체를 이루신 것이죠. 그러나 제자들로만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베푸시고 그들이 정말 예수님을 선언하고 증거할 수 있는 증인공동체로 만드신 것을 저는 교회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은 제도와는 거리를 두신 것이죠. 저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란 제도가 되기 직전까지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공동체라 하더라도 제도가 되는 순간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지 않나 보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나 안디옥교회도 선교사를 파송했지 않았습니까, 집사도 있었고 기둥같은 지도자들도 있었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조직개념 같은 게 아닐까요?

 

조직같은 게 있었죠. 사도행전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일곱 집사를 세운 것은 일곱 집사라는 제도를 만든 것과 같다는 말이에요. 일곱 집사를 만들었을 때, 다시 말해 예루살렘교회가 어떤 봉사의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핍박을 만났다라고 생각해요.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는 일이 생겼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곱 집사라는 제도를 세웠지만 일곱 집사를 세우면서 교회가 다시 박해 속으로 들어가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제도 속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본질의 회복을 위해 흩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흩어져서 생기는 교회가 결국은 안디옥교회였어요. 또 그 안디옥 교회가 리더십에 안주하지 않고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서 파송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안주하지 않으며 제도의 틀 속에 갇히지 않는 그런 본질을 지켜나가는 것이 사도행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목사의 목회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목회는 기본적으로 성도들이 증인되도록 돕는 것이죠.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그야말로 더 메시지를 흘려보내는 일을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됩니다. 성경과 성령으로 그들이 교회되도록 하는 것을 도와드리는 역할이 목회의 본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성경과 성령으로 교회되도록 하는 것의 첫 번째 시작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레마(lemma)가 되도록 하는 일, 그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지녀야 하고 집중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저는 말씀이 전해지는 일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일들은 다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세상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지요. 실제 세상 속의 ngonpo들도 교회보다 그런 일을 훨씬 더 잘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가 되면 이 땅에 교회라는 확장된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지경이 이르는 곳마다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결국은 교회로서의 사람들이 세상 가운데 흩어짐으로써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시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구약에서 레위인들을 가나안 모든 성읍으로 흩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게 했던 하나님의 계획이 이 시대에도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된 성도가 흩어짐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게 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는 것이죠. ‘교회로 흩어지도록 돕는 일이 곧 목회다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도가 교회다라는 말씀 동의합니다, 이 성도라는 교회가 삶의 터전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잡(job)이 있었고, (job)이 있었다는 것은 사회와  소통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말이겠죠. 그래서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어떤 일터와 상황 속에서 살고있는지 알아야하며,  성도들에게 성경적인  일터의 삶  그 전형들을 제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목사님의 말씀이 한국교회의 현실에 비추어봤을 때는 이상적인 부분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한국의 목회자들은 사회를 모르지 않습니까?

 

사도행전적 교회들을 보면 텐트 메이커들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텐트 메이커셨는가?’ 예수님은 목수로서 30년간 생애를 가졌던 것은 텐트 메이커였지만 일단 세례를 받고 나서는 사실 제자들을 양육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썼지, 목수의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풀타임 목회를 하기 전에 세상을 두루 경험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복음서에 나오는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들도 평생 계속 하셨을 것이고, 또 나름대로 토라를 열심히 배웠고 익혔기 때문에 스스로 삶의 현장에서 토라 말씀을 이른바 상황화(contextualize) 하는 것이 일상화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분은 토라를 랍비 스타일로 안 가르쳤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모든 회중들이 이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말씀으로 듣게 된 것이죠. 예수님은 토라의 본질을 삶 속에서 충분히 상황화(contextualize) 할 수 있는 시간과 경륜을 가진 뒤에 공생애를 가지셨다고 봐야 됩니다

  

말씀의 상황화 침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사회랑 접목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신학교에서도 시스템이나 어떤 방편이라고 나온 것도 없는데, 목사님이 생각하시기에는 어떤 대안이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개인적인 농담으로도 그렇게 말합니다. ‘목사 안수를 50세 이후에 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30세부터였어요. 예수님도 풀타임 목회를 한 것은 30세 후 공생애였는데, 그 당시 30세면 오늘날 50세가 충분히 될 거라고 생각돼요. 그 나이가 들면 비교적 사적인 욕망으로부터 비교적 거리를 두고 풀려나는 나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젊기 때문에 공생애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아니고, 나이 들었다고 다 욕망에서 자유롭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개연성은 훨씬 크지요.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공생애의 표본이에요. 진정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사적인 이해관계를 벗어나는 삶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갖기 시작하고, 그 열정으로 살기 시작하는, 더 이상 사적인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삶을 살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공생애가 시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실은 그런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 가셔서 세상적인 유혹을 다 이기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벗어났는지 여부를 가리는 테스트를 거치신 뒤에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쫓는 제자들로서 그런 시간이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 또한 아라비아 사막에서 연단의 시간을 보내고 다소에서 무명의 시간을 가졌고 때가 이르러 안디옥교회를 맡게 되었지요. 그러나 거기에 연연하지 않았어요. 우리 크리스천들도 광야의 여정을 통해 말씀이 삶과 접목되는 시간을 충분히 거친 뒤에 비로소 공생애가 시작된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젊어서부터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풀타임 목회로 가는 게 어쩌면 보완해야 할 제도적인 부분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교육의 변화도 필요하겠고 교단 스스로의 깨달음도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일단 조심스러운 이야기이니까 그렇긴 하지만, 저는 어쨌건 교회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성령 받은 주님의 제자들로서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소위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진정한 메신저가 되어있나, 그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충분히 차고 넘치는가에 있겠지요

 

그것은 소명에 관한 얘기입니까?

 

그건 소명의 얘기이기도 하고 자질적인 부분이기도 하죠. 사도바울이 헬라어를 구사하고 로마시민권을 지녔던 까닭에 이방인 선교를 위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듯이, 세상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자격과 조건이 준비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사회가 다양화되고 전문화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우리가 지금 어떤 목회를 하든지 간에 전문인들의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데 접목되고 접속될 수 있는 어떤 부분들이 많이 필요해진 것이죠.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조건이나 준비가 전보다도 훨씬 많은 기간을 필요로 하며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제적인 교육에 묶여있는 신학생들이 자동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곧바로 정형화된 틀에서 사역을 합니다. 자신 스스로가 깨닫지 않고는 준비할 수 없는 그러한 요소라고 생각이 드는 데요.

 

제도권 교회로 바로 들어가는 경우에는 삶의 현장을 충분히 접근해서 보고 배우고 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지요. 현재의 목사안수 시스템으로는 그야말로 삶에 뿌리박은 영성을 키워가기에 상당히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른 나이에 신학에 올인하고 자기 생을 드리겠다고 한 것이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결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시스템 안에서 길러지는 것은 종교성이지 실제로 삶에 뿌리가 내린 진정한 영성을 키우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그런 영성을 갖추기에는 매우 힘든 여건이라고 봅니다.

 

 

2. 목사님의 목회철학의 형성은 기존교회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직교회의 정형화된 틀로서는 안 된다, 그런 구조의 틀에서는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지 못한다, 교회가 폐쇄된 성처럼 공교회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등 조직교회의 단점을 객관적으로 보셨왔기 때문에 자동적인 반감으로 형성된 부분이 있으시죠. 자세히 좀 말씀해 주시지요.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크리스천이 되면 본질적으로 공생애가 시작되는 것, 공인이 되는 것이라고 보았어요. 그런데 왜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공적인 삶을 살기에 턱없이 부족한가, 여전히 사생애 속에 묶여있는 크리스천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그런 큰 의문이 있었지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제도로서의 교회조차 지극히 개교회 중심주의예요. 교회라는 자체가 주님의 교회라면 어떤 교회든 공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모든 교회가 카톨릭 처치, 곧 보편적인 교회인데, 왜 교회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기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개교회주의에 빠져있는가. 그런 사실에 대한 의문과 일종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좋은 교회로 알려진 대형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권교회에 대한 회의가 들었어요. () 하용조 목사님께로부터 나름대로 많이 배웠고, 또 솔직히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그분께서 47살 늦은 나이에 교회 처음 나온 성도를 데리고 성경을 3년 이상 가르쳐주시고 이런저런 대화도 솔직하게 많이 해주셨습니다. 어느날 제가 하목사님께 제도가 되기 직전까지가 교회라고 직접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교회를 하고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그래서 교회가 제도가 되지 않도록, 성도들이 제도에 묶이지 않고 또 성도들이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실제로 하목사님 당시 온누리교회는 제도에 묶이지 않는 굉장한 역동성을 가진 교회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목사님이 떠나시고 나서 어떻게 보면 빠른 속도로 제도권교회에 편입되는 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우려를 가졌기 때문에 나오게 된 것이지요. 저는 대형교회란 제도로 인해 필연적으로 교회의 본질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어요. 그 교회가 어떤 교단이나 어떤 교파에 속하더라도 그 문제를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또 교회의 크기와 상관없이 교회가 제도의 안정성에 기대려고 하는 순간 그 문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정치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권력이라는 것이 제도 안에는 불가피하게 있는 요소라는 것을 압니다. 모든 제도는 돈과 권력으로 유지가 되죠. 그래서 교회가 제도화 되었다는 뜻은 교회가 제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보다 목회자나 성도들이 제도가 가지는 힘과 권력에 묶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어요돈과 힘, 돈과 권력적인 요소가 배제된 제도는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교회는 제도를 수용하지 말아야 되느냐? 아니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제도와 비제도 사이를 절묘한 영성으로 줄타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적인 교회라고 생각이 됩니다.

  

영성으로 조직과 비조직의 간격을 메꾸는 그런 이상적인 교회가 한국교회에 있었습니까?


저는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교회 초기에는 성도들이 한 가족이 돼서 한 믿음, 한 성령 안에서 활발하게 부흥을 해가죠. 또 그럴 때 진정한 변화가 있어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는 교회가 제도라는 틀 안에 있어도 제도에 갇히지 않고 제도와 비제도 사이를 절묘하게 걸어가는 것이 보이죠. 저는 그런 교회를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제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를 고민하다가 미니스트리(ministry) 시스템을 없애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역제도를 없애는 것이죠. 교회가 사역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죠. 저는 복음은 늘 시대에 답했다고 믿습니다. 어떤 시대든 복음은 시대를 넘어서는 힘이고 능력이고 종교가 답할 수 없는 것을 답한다고 생각해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복음 자체가 종교의 틀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란 생명이고 사랑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주장해오는 것이 인간이 물리의 세계에서 해결되는 것이면 메타피직스(형이상학 metaphysics)가 필요 없듯이, 종교로 해결되는 것이라면 복음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다’ ‘예수는 종교 이상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종교를 멸하러 오신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종교는 인간을 구속하고 속박하고 진정 진리만이 인간을 자유케 한다고 선언하시고 정말 토라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 하나님의 본질을 선포하는 것에 힘쓰셨어요. 하나님의 본질을 선포함으로써 탄생하는 하나님 나라가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떤 제도 안에도 갇히지 않았고 어떤 제도도 만들지 않으셨어요.

 

제자 12명이 제도가 아니잖아요? 12명의 커뮤니티를 만드셨을 뿐이에요. 커뮤니티는 진정한 커뮤니온 성찬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이고 그 공동체를 교회라고 지칭하신 것입니다. 그 교회는 돈과 조직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분 안에 모든 답이 있어요. 우리가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그분 안에서는 너무나 단순하고 심플하다는 것이죠. 그 텍스트를 우리가 잘못 상황화(contextualize) 해놓은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적인 지식으로 복음을 훼손시키거나 곡해해놓은 것이죠. 복음은 원초적이고도 가장 단순해요.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답을 갖고 있어요. 그 답이 결코 이 시대를 구원할 수 없는 낡아빠진 것이 아니라 시대와 세상이 어떠하든 세상의 본질이 죄악이라면 그 죄악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복음밖에 없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너무 세상적인 지혜나 세상적인 방법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가족은 제도로서의 가족을 경험하는 공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과 생명을 경험하는 곳이죠. 교회와 가정만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인스티튜션(institution)이고 나머지는 전부 세상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가정과 교회만이 하나님이 주신 인스티튜션(institution)이고 거기는 생명과 사랑이 있을 뿐이지, 권력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제도로 경험할 것이냐, 단순한 공동체로 경험할 것이냐, 거기에 우리의 결단이 있을 뿐이에요.

 

제도로 경험하면 돈과 권력 속에 스스로 갇히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승자박하는 길밖에 없어요. 처음에는 건전하게 시작할지 몰라도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 덫에 걸리게 되어 있는 것이죠. 교회 제도 자체가 사람과 돈, 힘을 컨트롤하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동안 스스로 에너지를 빼앗기고 말게 됩니다.

 

 

 

3. 목사님께서는 1980년대 군부독재 하에서 <사회부 기자, 정치부 기자, mbc 특파원> 활동을 하셨습니다. 객관적인 위치에서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평가했던 부분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고도의 경제성장과 함께 이루어진 교회성장이 잘못된 기초에서 이루어졌고, 현재 그 열매를 취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솔직히 그때는 교회에 대한 관심이 없었지요. 교회 중에 운동권과 결부돼 있거나 좌파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반정부나 반체제 운동에 연루돼 있는 것에 대해서 오해하기도 했었어요. 그러나 제가 크리스천이 되고 보니까 복음은 결코 좌도 우도 아니에요. 복음은 그것을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먼저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식민운동을 하거나 반제국주의 운동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신 분이셨지요. 이 시대에 예수님이 좌파운동 혹은 보수운동을 하시겠습니까? 그분은 이 땅 가운데서도 역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것입니다. 구원의 본질이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복음 받은 사람, 생명 받은 사람은 자신이 처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입니다. 그것은 각자의 몫이라고 봅니다. 운동권을 만드는 것은 제도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기가 아주 쉬운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에는 칼을 품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가롯유다같이 민족주의적인 열정이 대단히 강했던 사람도 있었어요. 예수님은 그들을 다 품었지만 그들과 함께 운동을 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지저스 무브먼트(jesus movement)를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이 땅 가운데 모든 것들을 구원하는 복음의 생명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그 시대 속에 살아가야하는 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정형화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윤리라고 해서, 내가 속한 조직 안에서 불합리한 조건들이 제시될 때 조직을 따라야 할 것인가, 안 따라야 할 것인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이 충분히 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나 사랑이 살아 움직일 때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 사회 속에서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요소를 내포합니다. 예를 들어 나치 치하라면 미치광이가 버스를 모는 데 운전수를 멈추게 하는 게 당연한 일이잖아요. 생명을 해치는 일이라면 수수방관할 일이 아니지요. 그 때문에 우리는 일사각오로 사셨던 주기철 목사님을 믿음의 선배로 존경합니다. 그분을 우리가 추앙하고 그리워하는 까닭은 그 시대 누구도 그렇게 감히 맞설 수 없었던 신사참배 운동에 그토록 담대히 맞섰기 때문이지요. 그런 삶은 그분 안에 진정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주목사님이 게릴라를 만들어서 지하투쟁을 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분은 교회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너무 사랑이 컸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사는 게 한없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다섯 차례나 투옥되면서 모진 고문을 겪고도 신앙을 지키셨습니다.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젊은 청년들과 함께 애국동맹단을 만들어서 일제 식민 관청이나 경찰서를 급습한다든지 테러를 가한다든지 하는 게 우리로서는 훨씬 더 끌리겠지만, 주목사님은 진정 복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고문하는 형사를 향해서 아무 증오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나를 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연관해서 말씀을 해주시지요.

 

해마다 국가조찬기도회라든지 행사가 있는데, 왜 꼭 그래야 하나 생각이 들죠.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일반에게 알려질 때 국민정서가 어떠한가를 너무 몰라서 그래요. 한국 언론은 기본적으로 반정부적이고 반체제적입니다. 식민지 시대에 처음으로 신문이 탄생했기 때문에 반체제적이고 반정부적이에요. 또한 군사독재정권을 지나면서 언론의 기능은 반체제적 반정부적 속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어요. 그런 속성들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권력이나 정권, 이런 것들과 함께 유착돼 있다고 볼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반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을 잘못됐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왜 정통성이 없는 권력과도 야합하느냐고 그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어쨌든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교회마다 나라와 민족과 북녘 땅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세력이 되면 다수 국민 가운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반발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무릎 꿇게 하고 안수기도를 하는 것도 언론에 공개된 자리가 아닌 곳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나라의 정서나 언론의 정서를 너무 무시한 일이지요.

 

 

4. 내년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각종 학술대회, 기념대회 준비로 분주한데 목사님께서는 한국교회가 바로 세워지려면한국교회가 대회나 행사보다 무엇을 준비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마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해서는 몇 년 전부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미완의 개혁이고, 그분 자신이 신부였기 때문에 종교 자체를 슬림화하는 데 그쳤지, 그야말로 복음만으로 충분한 원점으로 돌아가는 데는 미흡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서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처치라는 말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그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 입장에서 우리를 프로테스탄트 했다고 말을 붙였죠. 그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에클레시아 원형으로 뿌리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혁이란 날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실천되어야 할 당위이지, 하나의 목표로 삼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 증언공동체가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본질로 돌아가 있는 교회 공동체를 경험하는 것이지 우리가 지금 제도를 바꾸어서 개혁이나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베이직 처치라고 해서, 백 투 베이직(back to basic) 끝점에 있어서는 마틴 루터가 올바른 키워드를 잡은 것이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돌아가면 교회가 되는 것이지, 교회가 개혁되는 것은 아니에요. 원래 아니었던 것을 어떻게 개혁합니까?

 

원래 정신구조의 문제가 어렵지 않습니까?  사고의 틀과 구조 안에 묶여있어서 이런 것들을 깨고 자각을 해야지만 목사님이 말씀하신 기본으로 돌아갈 수 있거든요.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

 

주님께서 가라지를 내버려 둬라 하셨지요. 가라지는 주님이 오셔서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어떤 이념적인 논쟁으로 몰아가면 가라지를 뽑고자 하는 노력과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본질을 살아내는 존재지, 비본질적인 것과 부딪히는 존재가 아니에요. 비본질적인 것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는 본질과 비본질이 부딪힐 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예요. 십자가입니다. 가장 쉽지만 가장 어렵습니다.

 

병 들었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병든 줄을 모르는 사람한테 당신은 병자라고 얘기해야 병을 인정하지 않는 동안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자가 갈급한 마음으로 나와야 눈을 뜨겠지만 눈먼 줄도 모르는 자가 와서는 눈을 뜨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주님이 주시는 본질이 답이기 때문에 우리가 비본질과 싸우면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날마다 그분 안에서 본질을 살아내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이 시대가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도 바리새인이건 제사장이건 율법학자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예수님이 그 당시 이단의 괴수로 여겨졌을 뿐입니다. 종교전문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들 종교전문가 계층만 강하게 비난하셨지, 불신자들을 비난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오셔도 그렇게 동일하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5. 목사님 sns(트윗과 페이스북) 팔로워가 20만명에 이릅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목사님의 sns 글을 통해 전도되어 교회로 오고 있습니다. 현대 목회와 목회자들에게 사회 소통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예수님께서 토라를 그대로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으시고, 본인이 토라를 살아내셨죠. 그리고 제자들을 삶의 현장으로 데리고 가서 말씀이 어떻게 삶의 자리에서 성육신하는지를 날마다 보여주셨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우리가 엇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려면 우선은 쓰는 언어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시대가 알아듣는 언어로 가르치셨기 때문에 수많은 비유가 탄생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던 삶의 자리에서 캐어낸 가장 익숙한 비유들이잖아요. 모든 예화나 비유의 말씀뿐만 아니라 메시지의 전달방식 또한 삶 속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언어와 전달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에스더서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단 한 자례도 등장하지 않지만 성경적 메시지를 전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날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라는 말이 없어도 불신자들(전혀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분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깊이 고민해야 될 상황이라고 봐요. 예수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순간 돌아서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사람들이라도 그들 역시 복음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알고 믿고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복음을 불신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전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모든 율법을 풀어서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도 동일하게 복음에 담겨있는 복음의 씨앗들을 풀어서 전해야 하겠지요. 사도바울은 복음을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라는 세 씨앗으로 표현했다고 봅니다. 복음 안에 있는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라는 세 씨앗은 시대를 초월해서 필요한 메시지예요. 그래서 우리는 종교적 표현을 과감히 제하더라도 사랑과 소망과 믿음과 같은 메시지를 불신자들과 커뮤니케이트(communicate) 할 수 있는 키워드로 삼으면 복음은 반드시 전해진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삶이 메시지이고 우리의 모든 것이 메시지입니다.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는 수많은 메시지의 통로를 만들어놓았는데 정작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치열한 고민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그걸 우리가 지금 해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이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사랑하면 불륜만 연상하는 사람한테 사랑 그러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관심을 기울여라, 상대방을 배려하라, 상대방을 깊이 캐어하라, 이렇게 해야 그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라는 느낌이 전달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시오, 원수를 사랑하시오 해봐야 울리는 꽹과리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렇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익숙하게 쓰고 있는 성경의 용어 자체를 시대적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 바로 설교자들의 몫이 아닙니까. 이 시대가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와 표현으로 더 과감하게 바꾸어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6. 마지막으로 목사님 사역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합니다. <베이직교회>의 설립과 과정, 현재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그리고 목사님 가족 이야기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온누리교회를 사임하고 집에서 아내와 둘이 예배드리기 시작했어요. 주일날 제가 설교하고 아내가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둘이서 예배드리다가 지금 동역하고 있는 안신기 목사님집에 가서 성탄절에 두 가족이 예배를 드렸어요. 그러다가 제가 집에서 함께 성경공부하던 멤버들이 30명 정도가 됐을 때 집에서 예배드리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때 까페 히스토리였던 이 장소(현 베이직처치)가 주일날 비어있다는 얘기를 듣고 20133월에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일만 빌려서 썼는데 무료로 6개월을 빌려줬어요. 계속 그렇게 쓰다가 아침 예배를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다들 마음이 합쳐져서 이 공간을 정식으로 빌리게 됐습니다. 요즘은 매일 아침예배와 함께 주일예배를 5번 드리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를 보면 알겠지만 기존 교인들은 안 왔으면 좋겠다고 얘기 드렸습니다. 많이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계속 늘어나 작년에 라이프교회라고 목사님 한분이 나가서 개척을 했어요. 그런데 같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분도 있고, 그분은 합신 교단으로 들어갔어요. 그걸 보면서 교회가 흩어지기 위해 기존의 교회 개척과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목회라는 것은 내 dna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교단 dna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 dna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래서 전통적인 방법 대신 다른 방법이 나을 것 같아서 현재 성도들이 어떻게 흩어질 것인지 정리하고 있습니다. 방법을 놓고 기도중이고, 가을부터는 교회로 흩어지는 모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교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교회가 되었느냐 안 되었냐를 검증하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분이 목사일 수도 있고 새로운 성도일 수도 있겠죠. 여기서 사람들이 변화하는 것을 보았고 끊임없이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세워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필요하다면 세워지는 분들이 신학교를 갈 수도 있지만, 신학과정이나 다른 모든 제자훈련 방법으로도 영적인 리더로서 세워지기가 어렵다면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방법을 새롭게 바꿔야 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가족 말씀은?

 

제 아내는 남편을 47살에 교회로 오게 할 만큼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어서 본인도 깨지는 시간을 많이 가졌고, 제가 신학을 공부하며 57살에 안수받는 기간 동안 제 아내도 거듭나는 것을 경험하고 좋은 동역자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목회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목회자의 가족이 교회 안에서 모두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안신기 목사와 동역할 때 사모 둘이 같이 어떤 형태로건 성도들에게 공개가 되고 성도들과 충분히 교제할 수 있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아내와 저의 부족한 점이 다 드러나고 부족한 점이 성도들한테 용납되고 그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 아니라면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먼저 교역자들 가족 서로 간에 그런 사랑이 없다면 서로 사랑하는 일, 주님이 명령하신 본질적인 일 외의 다른 일만 하게 되겠지요. 그게 위선을 부추기는 길 아닙니까.  

  

가족이 내 얼굴이고 가족의 부족한 점이 내 부족한 점인데 마치 내가 신비한 인물처럼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 것들 때문에 대형교회 가보면 목회자들의 가족이 누군지도 서로 모른 채 그렇게 교역자들끼리 사역구조로만 묶여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교회가 진정한 커뮤니티라면 그런 것들이 투명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서로의 진정성을 기르고 지키는 건강한 통로라고 믿습니다

 

 

* 귀한 말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터뷰 정리 / 목사월드 정 진 목사)

 

 

* 조정민 목사님 프로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연세대 대학원 정치학과 졸업,

고든 콘웰 신학대학교 목회학 석사 졸업

) mbc 워싱턴 특파원 및 뉴스 앵커, imbc 사장, cgn tv 대표

) 베이직교회 목사

 

저서) 《why salvation 왜 구원인가?》, 《why jesus 왜 예수인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땅의 시간 하늘의 시간》, 《사람이 선물이다》, 《인생은 선물이다》, 《길을 찾는 사람》,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목마른 이에게 건네는 열두 모금 생수》 등

 

 

ⓒ 저작권자 목사월드

 

핫클립

  • . 등록된 뉴스가 없습니다.